[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서초동에서 슈퍼를 운영한다는 A씨는 절규했다. 최근 몇년새 인근에 대형마트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영업시간을 새벽 1시까지 늘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업조정을 신청했지만, 되돌아온 답변은 대형마트에서 담배나 쓰레기봉투 등 일부 품목을 팔지 못하도록 한 게 전부였다.
그는 국회의원들과 정부 고위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윗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현실성 없는 대책을 내놓는 사이 우리 같은 '아랫사람'들은 다 죽어난다"고 하소연했다.
30년간 자전거 판매점을 운영했다는 이도, 한평생 빵장사로 먹고 살았다는 이도 저마다의 속사정을 마치 한풀이하듯 쏟아냈다. 사연은 각기 달랐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현실은 이런데 나라는 무엇하고 있는가."
1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소상공인 국민토론회는 서민경제가 처한 현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중소기업 대표·소상공인 300여명이 모였고 이들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열띤 토론을 벌였다. 골목상권이 처한 상황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18대 마지막 정기국회 첫날 열린 이날 토론회는 지난달 발족한 '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을 지키는 의원모임'의 첫 공식활동이기도 했다.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영환 민주당 의원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를 막론하고 89명의 의원이 뜻을 같이 했다"며 "국민의 소리, 분노를 모아 입법으로 뒷받침하겠다"고 했다.
국회의원 한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관이다. 전체 의원 가운데 3분의 1 가까이가 뚜렷한 목적을 갖고 머리를 맞댔다. 더군다나 여야가 뜻을 같이 했다. 국회의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본의는 그게 아니었는데 당론에 밀려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게 됐다.
구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한다는 한 사장은 이날 유일한 여당 참석자인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에게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그간 오로지 한나라당만 보고 살았다. 그런데 이젠 나뿐 아니라 주위에서도 한나라당이 맞는 건지 의심한다. 잘 처신해달라."
언뜻 협박조로 들리는 이 덤덤한 고백은 실상 민주정치의 기본원리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한다. "내가 표를 줄테니, 나를 위한 정치를 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표를 주겠다."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로 모임에 참석했다 해도 괜찮다. 그래도 이왕 모임에 가담한 이상, 골목의 외침을 경청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보여주길 바란다.
최대열 기자 dy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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