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심지와 슬픈 예감. KBS <공주의 남자> 속 주인공 세령, 그리고 그녀를 연기하는 배우 문채원의 얼굴에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다. 이것은 이율배반적인 정서가 아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과 운명이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 믿는 사람. 하지만 세상의 얼굴은 언제나 한 가지,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뿐. 고래로 비극이란, 후자의 사람들과 만만찮은 세상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세령은 조선시대 왕족의 여자답지 않게 말을 타고 싶어 하고, 자신의 배필을 직접 확인하러 사촌 경혜 공주(홍수현) 대신 강론에 참석하는 대담한 여성이지만 아버지의 정적 김종서(이순재)의 아들 승유(박시후)와 사랑에 빠지며 잔혹한 불가항력을 경험한다. 문채원이 자신의 얼굴에 담아내는 두 가지 감정은 그래서 드라마의 핵심과도 같다. 또한 이제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이 젊은 여배우가 그저 예쁘다는 빤한 개념으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 성인 연기로 합격점을 받았던 SBS <바람의 화원> 속 기생 정향이 매력적이었던 건, 엄청난 재력가인 김조년(류승룡) 앞에서도 자신을 취하려거든 전 재산을 내 놓으라 말하는 꼿꼿한 심지가 여성적인 얼굴과 말투에 드러나서였다. 그것은 최근의 캔디 캐릭터들에게서 드러나는 유사 남성적인 당돌함과는 다른 부드럽되, 그래서 더 강한 여성성이었다. SBS <찬란한 유산>의 승미가 흔한 악역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저 옳고 그름 앞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가 아니다. 사회에서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승미의 태도에는 단순히 성격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강한 의지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캐릭터는 문채원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형상화된다. 아직 연기적으로 결코 노련하다 말할 수 없는 이 배우에게서 미숙함이라는 단어보다는 가능성이라는 말을 읽어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녀의 발전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음의 리스트는 그래서 더 각별할지 모른다. 기분 좋을 때 듣는다는 이들 음악을, 연기의 길 안에서 더 자주 듣기를, 이 길이 그녀에게 즐겁고 기분 좋은 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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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sse Lindh의 < You Wake Up At Sea Tac >
세령의 사랑에 대해 “가족을 배신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사랑은 포기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문채원은 애절한 러브송인 라쎄 린드의 ‘C'mon Through’를 추천했다. ‘내 마음을 파헤치세요’라는 뜻의 이 노래는 MBC 시트콤 <소울메이트>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한데, 서로 엇갈리던 남녀가 상대방이 영혼의 짝임을 깨달을 때 흘러나오며 시트콤에 애절함을 더했다. 그와 한국의 인연은 <소울메이트>로 끝나지 않았는데, 첫 내한 공연 이후 자주 한국에 오던 그는, 아예 홍대 주변에서 자취하며 한국의 문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신촌 자취생이라는 별명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 덕분에 올해 그린 플러그드 페스티벌에도 초청될 정도로 한국에서 유독 사랑받고 있다.
2. Celine Dion의 < Titanic OST >
두 번째 추천 곡은 설명이 필요 없는 메가 히트 넘버인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이다. 셀린 디온의 유명세와 곡 자체의 서정성, 그리고 영화의 흥행이 더해지며 가히 20세기 마지막 클래식의 위치에 오른 곡이다. “<달려라 고등어>의 오디션 전날 눈썹 부근에 화상을 입어 붕대를 감은 채 오디션장에 들어가 ‘꼭 하고 싶습니다!’ 라고 외칠” 정도로 당돌한 신인이었던 그녀가 역시 부잣집 공주님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모하는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이야기인 <타이타닉>의 주제곡을 고른 건 일견 이해할 만하다. 특히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담대한 면을 보여주는 세령은 역시 보수적인 시대에 저항하는 로즈를 연상케 한다.
3. Turtles의 <시네마 천국>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처럼 사운드트랙을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세 번째 추천 곡 역시 영화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 삽입으로 유명해진 터틀즈의 ‘Happy Together’다. 기분 좋을 때 듣는 음악이라는 이번 테마 속에서 어쩌면 기분 좋아지게 하는 음악에 가장 가까운 곡일지도 모르겠다. 차분하지만 조금씩 분위기를 고조하다가 ‘I can't see me loving nobody but you for all my life’라는 후렴구에서 흥겹게 폭발하는 곡 구성은, 발표됐던 60년대 중반에도 큰 인기를 끌며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해피 투게더>의 왕가위 감독이 정작 삽입하고 싶었던 건 아방가르드 뮤지션인 프랭크 자파의 리메이크 버전이었다고.
4. Oasis의 < Be Here Now >
“마음껏 뭔가 학생 특유의 젊음을 풀어내고 싶어” 막연하게 학원 드라마에 출연을 결정했던 의외의 시원스러움을 가진 그녀는 록 음악도 추천했다. 이제는 추억의 이름이 되어버린, 하지만 아직까지도 재결성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는 밴드 오아시스의 곡 ‘Stand By Me’ 이다. 전작이자 아마 오아시스 최고의 앨범으로 기억될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대성공 이후 내놓은 앨범 < Be Here Now >에 수록된 곡으로 ‘Don't Look Back In Anger’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느린 템포 안에서 흥겨우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를 뽑아내는 오아시스 스타일 로큰롤이다. 기타 사운드가 좀 더 정제되었던 전작에 비해 디스토션이 강해진 면이 있지만 리엄의 목소리는 여전히 쉽게 폭발하지 않아 더욱 힘 있게 느껴진다.
5.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 The Wind, The Sea, The Rain >
‘야자와 아이의 섬세한 그림체를 좋아하는’ 문채원은 그만큼이나 섬세한 멜로디의 곡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폭풍 속의 주’를 골라줬다. 최고의 보컬 그룹 중 하나인 브라운 아이드 소울은 비록 전문 CCM 팀은 아니지만, 이 곡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꼭 신앙인이 아니라 해도 누구나 귀를 기울일 만큼 서정적인 곡인데, 배경에 깔리는 건반은 철저히 보컬을 서포트하는데 주력하며 보컬 그룹으로서의 매력을 드러낸다. 특히 그들의 R&B적 스타일 자체가 흑인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고, 흑인 음악의 상당한 영역은 성가에서 비롯된 만큼 < The Wind, The Sea, The Rain >에 수록된 다른 곡들과의 위화감 역시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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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사극 연기에 도전한 문채원은 기자간담회에서 “단아한 이미지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밝혔다. 무예 실력을 갖춘 영화 속 자인은 분명 그녀가 과거에 맡았던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활동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문채원은 결코 단아한 이미지에 쉽게 갇히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 단아함 속에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꼭꼭 담아두며 긴장감 있게 드러낼 줄 알았던 배우였고, 그 에너지를 이번 <최종병기 활>을 통해 터뜨렸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요컨대, 말을 타고 싶어 하는 세령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내치고 좀 더 활동적인 인물이 된다면 충분히 자인 같은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배우의 변신은 그래서 변신이라기보다는 확장에 가깝다. 조금씩 외연을 넓혀나가는 그녀의 연기 영역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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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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