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반 넘게 남았는데 정권 말기 증상이 완연하다. 뇌물사건이 잇달아 터지는 것도 그렇고, 대통령의 '비즈니스프렌들리' 국정 기조를 잘 아는 여당에서 대기업을 욕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정권 말기 증상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은 경제정책의 방향 상실이다. 기존의 방향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는데 새로운 방향은 안갯속이다.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은 그 제목과 달리 방향의 혼선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성장률 목표를 낮추는 대신 물가안정에 치중하겠다는 것이 정부가 내세운 경제정책 방향이다. 그것도 물론 방향은 방향이고, 국내외 상황으로 보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옳은 방향이다.
그런데 그뿐이다. 그 문건에서 진정한 방향 전환을 볼 수 없으니 국민이 새로운 꿈이나 희망을 얻을 수 없다. 현실 상황에 대한 뒤늦은 인정과 터질 위험이 있는 곳에 대한 땜질 처방이 대부분이다. '서민생활 안정'이니 '지속성장 기반 강화'니 하는 듣기 좋은 말은 다 들어 있지만 '이거다' 싶은 것은 없다. 그런 것에 방향 전환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뿐이다.
이번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은 관료 박재완의 작품으로 보면 무난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공식 명목상 최고 권력자이자 정치 지도자인 이명박의 작품으로 보면 입선에 해당하는 평점을 주기 어렵다.
국민이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를 청와대의 주인으로 뽑아준 것은 '경제대통령'으로 능력을 발휘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집권 후 대기업의 세금을 깎아주고 저금리와 고환율로 대기업의 수출가격 경쟁력을 뒷받침해주면서 경제성장을 재촉했다. 덕분에 대기업의 수출이 늘어나고 대기업의 금고에 돈이 넉넉하게 쌓였다. 그러나 그 돈이 돌지 않아 국민경제라는 바퀴에 혹이 생겨 잘 굴러가지 않게 됐다.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빈익빈 부익부이고 민생고다.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었던 이런 결과를 예방할 생각을 하지 않은 탓이다. 물가라도 안정되면 큰 탈 없이 임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 텐데 물가가 심상치 않다. 여섯 달 넘게 4%대의 고공행진이다. 이번 물가상승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부진 속 인플레이션)을 넘어 스크루플레이션(쥐어짜는 인플레이션)의 성격을 띠고 있어 위험하다. 누구를 쥐어짠다는 말일까. 상류층은 놔두고 이미 궁지에 몰린 중산층과 서민만 쥐어짠다.
이대로는 여당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이겨 여당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한나라당에서 나오는 소리가 재벌에 대한 비판과 법인세 감세 철회론이고, 청와대에서 나오는 소리가 민생 챙기기 행보와 양극화 해소 매진론이다. 그러나 입법과 정책으로 구체화된 것은 별로 없으니 아직은 내실 없는 이미지 정치 차원이다.
지금의 경제난은 MB노믹스(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와해의 증거라기보다 여전히 골간을 유지하고 있는 MB노믹스의 때 이른 후유증이다. 그것이 현재의 정권과 다음 정권을 노리는 여당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듣거나 말거나 한나라당의 새 지도부에 조언 한마디 해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MB노믹스를 타격하고 얼치기가 아닌 진짜 방향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정권 재창출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어부지리나 챙기려고 해서는 민심을 얻기는커녕 어육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MB피로증(MB Fatigue)을 잘 관리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피로증은 정신질환을 낳고, 금속피로증은 건물 붕괴로 이어진다. MB피로증이 정권의 레임덕으로만 끝나고 우리 사회의 더 큰 병증으로 번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이주명 논설위원 c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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