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부자들아, 걱정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은 재정적 지원의 대상이라는데 크게 연연하지도 않으며 별로 달가워 하지도 않는다. 이 말은 지원이 절실한 사람에게는 항복의 의미가 될 수도 있고, 계층의 사다리 끝에 발을 걸칠 수도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거세하고, 우리 사회의 갈등을 묵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가난한 이들에게도 가난한대로 삶의 미덕이 있고, 그 미덕이 부자인 사람들을 떠받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흔히 "예술가는 배고프다"고 말한다. 그렇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이 문화생산자 역할을 하고, 중산층 이상은 투자와 소비를 통해 생산품에 이문을 붙여 먹고 산다. 나아가 다른 재화 생산과 축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굳이 착취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생산자들이 여전히 가난해야 하는 이유가 부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로 카르텔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을 배척하고 무시한데서 나오는 게 아닌지 살펴볼 여지는 있다. 부자라고 놀고 먹는 이들아. 생각해보라. 가난한 이들이 만든 생산품(문화 예술)을 가져다 쓰고 있지 않느냐.
여기 내 친구를 소개하마.
잣나무골에 와서 처음 살 당시 이웃인 벼루 조각가와 곧 친구가 됐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이 많았다. 그저 '형님'이라고 불렀다. 흰머리결과 긴 턱수염이 멋있었다. 그는 보령벼루 전승가로 명망 있는 장인이었다. 그가 조각한 것은 무엇이든 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천품(天稟)을 지녔다. 대개의 벼루는 용 문양이 들어가는데 그는 청개구리, 여치와 같은 곤충 문양을 즐겨 썼다.
벼룻돌도 맷돌 쓰기를 좋아했다. 그의 벼루는 문외한인 내 눈에도 너무나 탁월해서 늘 탐났다. 하지만 그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누구한테 기댈 정도는 아녔다. 그와 나는 허구한 날 함께 술 마시거나 등산하거나 여행도 같이 다녔다. 자연스레 그의 친구들은 곧 내 친구가 됐다. 다들 한가락 한다는 장인들이나 처지가 비슷했다.
그들은 항상 빈손으로 모이지 않았다. 술이나 과일, 음식 등을 가져와 가볍게 평상에 자리를 깔고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신선 같았다. 번잡한 세상사와는 담을 쌓고, 풍진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 그들의 교제는 살림만큼이나 단출했다. 모임날이면 형님은 그동안 작업한 벼루를 벌여 놓고 친구들의 비평을 기다렸다.
"이번 개구리는 아주 섹시하네. 요즘 부부 금슬이 좋아진 모양이야"
대개의 비평은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내 눈에는 개구리가 다 같아 보였다.
"엉금 엉금 암컷을 찾는 놈을 여치가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데..."
"그러게. 여치가 자네 아닌가 ? 힘이 딸리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
그들의 농담과 웃음이 뒤섞이고, 언제나 흥겨웠다. 아닌게 아니라 개구리가 달라보였다. 그들의 비평은 쉬웠다. 나같은 먹물을 단 한번에 가르칠 정도로. 그야말로 재야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세상 누구에도 눈치를 보지 않고, 비굴하지 않으며, 풍요로웠다. 흉허물이 없고, 격식이 없었다. 그들은 자연속에 묻혀 벗들과 노래하고 춤췄다. 그리고 예술과 창작을 사랑했다.
밥을 나누고, 예술을 나누고, 인생을 나누는 그들의 청빈함에 묻어 나도 한동안 취해 있었다. 그들과 나누는 술맛이란….
우린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우린 터줏대감인 셈이다. 그새 사람들이 하나둘 밀려 들었다. 땅이 수 만평이나 되는 은퇴 기업인, '빅5' 엔지니어링업체의 회장, 서초동에서 내로라하는 중견변호사, 건설장비업체 사장, 은행 임원 등 소유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웃이 됐다. 나와 형님은 그들과 친해지지 못 했다. 그들은 우리가 차 한잔이라도 권할라치면 아주 점잖은 말로 거절했다.
너무나 정중하여 무안했다.
"괜찮습니다. 편히 드십시요. 저는 곧 식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거절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예의에 오히려 눈치가 보여, 우리는 늘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주눅 들었다. 어느 날 부자 중의 한 사람이 우리를 초대했다. 초대날은 보름 후였다.(젠장할 ! 그냥 '번개'하면 좋으련만) 형님이 내게 와서 물었다.
"모처럼 초대받았는데 빈손으로 가기 어렵잖나 ? 어떻게 해야 되는거지 ? 웬만해선 성이 차지 않을텐데."
만나는 게 격식이 되고 어려운 일이 되자 그의 행동은 곧 어색해졌다. 예의를 차려야하고, 거절하는 방법도 모르고, 목에 힘주는 일에 익숙지 않은 그가 걱정하는 것을 이해할만하다.
드디어 모임날 나는 빈손으로 갔고, 그는 텃밭에서 기른 3년생 더덕을 준비했다.
부자네 집에 들어섰을 때 나와 형님은 고급스런 분위기에 놀랐다. 화려한 음식 접시, 그리고 식탁 밑의 러그와 식탁보에 눈길을 빼앗겼다. 부자네 남자가 음악을 틀었다. 클래식이었다. 나는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모르니 그렇게 여기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그의 집에서 울린 음악 전체를 모차르트에게 부여했다. 부자와 그 이웃인 부자가 음악얘기를 했다. 뮤지컬과 세계적인 음악인에 대한 일화, 지식들이 오갔다.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리고 곧 식사가 시작됐다. 도자기와 유리그릇에 갖가지 음식이 조화롭게 담겼다. 여자들은 접시 얘기를 했다. 여자는 그릇을 구입한 내력과 여행 얘기를 했고, 남자들은 중국에 투자하는 방법, 펀드 수익률에 대해 자신들의 노하우를 열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간간이 경제신문 기자인 내게 방법을 묻기도 했다. '실은 그들이 나보다 더 고수인데…'난 내 간판덕에 몇마디 끼어들기는 했다. 반면 형님은 여전히 안절부절했다.
"남자들은 항상 저 모양이야. 만나면 돈 얘기, 투자 얘기, 사업 얘기…어휴…!!"
"자기들끼리 모여 여자 얘기 안 하면 다행이지."
부자네 여인이 한숨을 토하자 모두들 여인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부자네 여인이 순식간에 모든 발언권을 잡아챘다.
"이 유리 접시는 남편 바람난 거 복수하느라 언니하고 둘이서 이태리 갔다가 산거고요. 그때 그냥 이태리 여기저기 한달을 쏘아 다녔지요. 그리고 돌아와서 용서했어요. 참 예쁘죠 ?"
"이 사람이 다 지난 얘길하고 그래. 교양 떨어지게..."
"요 그릇은 지난번 이천에서 금당선생 기획전할 때 구입한거죠"
그녀가 그릇에 대한 추억과 내력을 두번째 읊었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의 품평이 이어졌다.
"나도 그 그릇 몇 점을 가지고 있는데 일년에 한두번 쓰고 주로 데코레이션으로 쓰고 있어요"
다른 부자네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이어서 차려진 음식에 대한 품평이 지루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모든 음식마다 먹는 요령에 대해 설명들을 늘어놓았다.
"이런 천민들 같으니...그냥 음식과 교제가 편안하고 아늑하면 어디가 부러지나."
욕설이 치밀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음식과 접시, 여행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서서히 맛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서둘러 집을 나서려고 일어섰다. 문득 식당 입구에 놓인 더덕 상자가 내일쯤 몰래 버려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가져온 물건이 아닌데도 덥석 들고 나와 버리고 싶어졌다. 형님과 형수, 아내도 따라 나섰다. 부자들은 후식도 먹고, 집안 구경을 하겠다고 다들 남았다. 식사하고 나오면서 나는 식탁보의 문양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봤지만 도통 기억나질 않았다. 대신 발바닥의 러그 문양은 너무도 선명했다. 아라비아 풍의 격자무늬 바탕 한 가운데에 낙타와 소년이 쉬고 있는 오아시스가 펼쳐져 있었다.
내가 그 집안의 풍경에 낯설어하고, 일찍 탈출하고 싶었던데는 잠시 엿보았던 부자들의 천민성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가진 것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태도는 내 먹물근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형님의 불편은 낯선 세계와의 조우에 있었던 듯 하다.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형님은 집에 가서 차 한잔하자고 청했다. 차 한잔 하기로 하고선 우리는 소주를 꺼내 먹었다. 돼지껍질 안주 놓고 점심에 먹었던 포도주 맛을 되새김질하느라 세 시간이나 떠들었다.
사람들이 더 몰려오고 형님은 몇 해 더 살다가 잣나무골을 떠났다. 곧 나는 외로워졌고 이웃간의 왕래가 닫혔다. 잣나무골에서조차 난 변방을 이뤘다. 그 변방의 변방에서 해가 지고, 또 지는 동안 지독히도 마음이 가난해져갔다. 나와 형님은 첫 모임이 있던 날 부자네를 통해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보다 인간적 충격이 더 컸다.
부자는 거절이 몸에 뱄다. 가난한 이는 거절이 익숙지 않다. 나의 형님처럼 말이다. 가난한 이는 돈을 소비하지만 부자는 돈을 관리, 보존, 투자한다. 가난한 이는 사람이 중요하다. 부자는 돈과 물건, 유산, 혈통이 중요하다. 가난한 이는 나눈다. 부자는 지킨다. 가난한 이는 생산한다. 부자는 소비한다. 이런 차이들은 부자들이 내게 가르친 기준들이다. 나의 편견이라면 부자들의 몫도 포함돼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형님과 살 때 부유함과 가난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와 비슷한 처지라서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어느 정도의 돈을 가져야 부자일까 ? 부자가 되려면 부자들과 교제하라고 하는데 나는 왜 그들과 교제가 막혔을까 ? 부자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몰아내고 있는 줄 왜 모르는가. 같이 살기 위해서 그들은 왜 노력하지 않는가.
아직도 나는 내가 가난한 건지 부유한건지를 헤아리지 못 한다. 다만 부유한 자들 속에 밀려나 있고, 생활방식이나 문화, 대화가 그들과 다른 것을 봐서는 가난한 자에 속하는게 분명하다. 비록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다 해도 말이다.
가난하다는 기준 또한 도무지 모른다. 소득이나 재산 보유 정도로 해야 하는 건지, 정서적 결핍 여부로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세상이 나눈다 만다로 시끄러운데 그런 것이 전혀 가난한 이들에게 정신적 지원조차 안 된다는 것을 부자들이 아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싸움이 그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경멸하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한다. 이처럼 빈정 상한 감정은 어떤 영적·지적 지원에도 해소될 길이 없을거다. 언젠가 큰 판의 전쟁을 치루는 것으로 결론 날 것이지만….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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