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당했지만 주민 아니라고 보상 無...연평도 주민들 냉대·공무원들 무성의에 "이민 가고 싶다"
연평도 주민들은 다치지 않은 사람들도 국민 성금과 각종 구호 물품을 지급받았지만 이들은 부상 후유증에 시달려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위로금 한 푼 받지 못했다.
#1. 연평도 출신 최병수(35ㆍ인천 남동구 거주)씨의 지난 6개월은 최악이었다.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던 최 씨가 지난해 10월 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연평도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최 씨는 '천붕'(天崩)의 슬픔을 안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한 달 뒤 다시 연평도에 들어가 집 안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북한군의 기습 포격을 당했다.
근처 해양경찰서를 노린 듯한 포탄 6발이 집 주변에서 터지는 바람에 집은 거의 반파되다시피 했고, 혼비백산한 최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주변의 어르신들을 수습해 대피소로 뛰어 들어가는 일 뿐이었다. 미군 2사단 전투병으로 복무해 전투 상황에 익숙한 최 씨였지만 포탄이 바로 옆에서 터지던 충격은 난생 처음 겪었다.
최 씨는 그 때 당한 상처로 이명ㆍ뇌진탕ㆍ어지러움증이 생겨 다음날 육지로 나와 병원에 입원했고,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아 10여 일간 치료 끝에 퇴원했다. 아직도 최 씨는 외상후스트레스성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밤에 잠을 못자는 것은 물론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깜짝 깜짝 놀란다. 언제 또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공포에 떨고 있다. 가는 곳마다 북쪽이 어느 쪽인지, 포탄이 날아 오면 어떻게 어디로 피할 지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최 씨는 "병원 약을 먹으면 잘 수 있지만 일시적이다"이라며 "그때의 공포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생각하기도 싫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다.
최 씨는 치료를 받긴 했지만 후유증이 심하고, 이런 저런 사후 처리를 하느라 한동안 생업에 전념하지 못해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연평도 주민들이 가구당 수 천 만원의 국민 성금과 각종 구호 물품, 특별 취로 사업 등의 혜택을 보상으로 받는 동안 최 씨는 치료비 몇 푼 외에는 아무 보상을 못 받았다. 연평도 주민들과 옹진군청이 협의 끝에 보상 대상에서 최 씨처럼 주소가 연평도가 아닌 사람은 제외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연평도 터줏대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인천으로 나와 남동구에 주소를 둔 최 씨는 그동안 애향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로 인해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 옆 집 사는 연평도 주민에게 이를 호소했다가 "인천 사람이 왜 남의 섬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느냐"고 면박을 당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옹진군청과 국민권익위원회, 청와대, 국회에까지 호소해봤지만 "자격이 안 되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는 지난 21일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입원 당시 위문 왔던 송영길 인천시장을 찾아 답답한 마음을 호소했다. 송 시장이 흔쾌히 "해결 방안을 찾아 보자"고 해 일단 믿고 있지만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최 씨는 "얼굴 다 알고 부모님과 친분이 깊었던 고향 사람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소가 인천이라는 이유로 외면하니 너무 서러웠다"며 "공무원들도 이곳 저곳으로 책임만 떠넘길 뿐 누구도 말을 성의있게 들어주지 않아 그동안 이 나라에서 살아 온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요즘 사태가 정리되는 데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고 한다.
한편 최 씨는 포격 직후 자신의 휴대폰으로 현장 동영상을 찍어 방송사에 전달해 하루 종일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모 방송국이 그의 허락도 없이 동영상을 도용하는 일이 발생해 속앓이를 하고 있기도 하다. 해당 방송국은 그가 항의하자 처음엔 30만원의 위로금을 주겠다고 했다가 더 따지니 "억울하면 소송해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2. 최 씨와 함께 병원에 입원했던 박명훈(44)씨의 상황은 더 안타깝다.
박 씨는 연평도 포격 당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군부대 막사 공사 현장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했다. 갑작스러운 포격에 함께 도망쳐 나오던 박 씨는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된 김치백ㆍ배복철 씨의 죽음이 아직도 안타깝다. 보다 젊었던 자신이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도피를 도왔으면 그들의 죽음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박 씨는 그러나 자신의 앞길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포탄이 떨어지면서 생긴 충격으로 사실상 영구 장애인이 됐기 때문이다. 박 씨는 오른쪽 귀의 청력이 손상돼 왼 쪽 귀로만 겨우 들을 수 있게 됐다. 이명 소리에 시달리고 있고 정신적 불안감과 외상후 스트레스성 증후군 때문에 아직도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불면증과 공포감, 과대망상증도 심한 상태다. 생계도 어려워졌다. 사태 이후 일을 하지 못해 아내가 남동공단 한 공장에서 벌어 오는 한달 8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지난달엔 생활비가 떨어져 어머니와 형님한테 손을 내밀어야 했다.
박 씨도 최 씨처럼 연평도에 주소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치료도 회사에서 산재 처리를 해줬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다. 연평도 주민들이 각종 보상에다 고임금(일당 5만5000원)의 특별 취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옹진군청에 문의했지만 "연평도 주민이 아닌 사람은 해당 사항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는 "막말로 민간인 희생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연평도 주민들이 보상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것 아니냐"며 "나를 따뜻하게 대해 준 회사 동료들과 사장님만 아니었으면 정말 목 매달아 죽었을 지도 모른다. 형평성 있고 공정한 보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한편 인천시 사회복지봉사과 관계자는 "옹진군청과 주민들의 합의 하에 기준을 정해 보상이 추진되다 보니 사각지대가 생겼던 것 같아 안타깝다"며 "현재 국민 성금 중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남은 돈을 활용해 두 사람과 같이 억울한 이들이 있으면 보상해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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