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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비전·실용 리더십..한국경제 새 성장좌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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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영토- 제1부 칭기즈칸 제국과 대한민국
<1> 칭기스칸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담대한 희망·애국정신 - 교역통한 경제활동
강대국 틈에 낀 약소국서 세계 최강국 웅비


[아시아경제 박성호 기자]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인물은? 흔히 생각하듯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이 아니다.

1155년 당시 정말 보잘 것 없는 몰골 유목민으로 태어난 칭기스칸이 세운 제국의 면적은 777만㎢로 알렉산터대왕(348만㎢)이나 나폴레옹(115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히틀러가 침략으로 확장한 영토인 219만㎢를 모두 합하더라도 칭기스칸보다도 작다.


◇몽골과 대한민국의 환경
칭기스칸이 태어난 당시 몽골은 대한민국과 너무나 흡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몽골고원이 있고 그 밑에 고비사막, 또 그 아래로는 비옥한 중국땅이 있다. 비옥한 땅과 몽골사이에는 만리장성이 있었다.


만리장성 위쪽으로는 몽골족 뿐 아니라 돌궐족, 흉노족, 메르키트족, 타타르족 등 수많은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에게 몽골고원은 꿈의 땅이었다. 드넓은 초원이 있어 살기 좋고 비옥한 중국대륙으로 통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유목민족은 몽골과 수많은 군사적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어 내분이 심했고 중국 역시도 수많은 유목민족의 세력확장을 경계해 때로는 3년마다 몽골고원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학살 프로그램'을 만들기끼지 했다.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옛 왕족의 후손으로 소위 명문집안이었지만 결국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을 당한 후 그의 가족과 부족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칭기스칸은 "우리 조상이 왜 이리 고생하고, 아버지는 왜 독살을 당하고, 우리 부족은 왜 늘 싸우는가"를 고민했다.


여기서 칭기스칸은 바로 "몽골고원이라는 한정된 곳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동족들에게 광할한 초원의 푸른바다로 나갈 것을 설득, 몽골인들의 시선을 지평선으로 돌려놨다.


◇칭기스칸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칭기스칸의 몽골제국 정식명칭은 에케 몽골 울르스다. 수도는 울란바트로. 황제의 칭호가 바로 대칸, 혹은 카한이라고 했다.


대칸이 되기 위해서는 쿠릴타이라는 몽골 고원의 관습에 의해 만장일치제를 거쳐야 한다.


칭기스칸은 1203년 아버지를 독살한 타타르족과 자신을 키워준 케레이트족을 평정하면서 몽골초원을 통일했고 1206년 칸의 자리에 올랐다.


칭기스칸제국의 영토는 인도와 고려, 일본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영토와 남시베리아, 터키 등 동유럽으로까지 확대됐다.


내분에 휩싸인 몽골을 통일하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그의 비법은 무엇일까.


◇칭기스칸의 리더십과 시스템
칭기스칸은 웅대한 비전이 있었고 이를 공유하는 방법을 알았다. 적은 군사력을 가지고도 이 비전을 현실화한 것이 속도의 법칙이다.


그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그의 부족을 이끌어 나갔다. 나라는 만드는 것, 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 또 그 천하가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비전을 키웠고 이를 공유했다.


1227년 칭기스칸이 사망했을 때 몽고군은 고작 12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유목민족에게는 대규모 병력이었지만 당시 중국 한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고 전체 인구를 따져도 당시 한족인구 2000만명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 같은 약점을 극복케 한 것이 바로 '스피드'다.


몽고군이 점령한 면적을 보면 당시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와 비슷하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몽고군의 빠른 기동력 때문인데 당시 몽고군들은 작지만 점프력이 좋은 말과 말 안장 밑에 소 두마리 분량의 말린 고기, 손에 익은 작을 칼과 활로 무장했다.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 서양 기사들은 양철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특히 공용도로를 개설하고 일정거리마다 역을 세워 역참제도를 운영했다.


칭기스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도 1만개가 넘어 이 길을 통해 상인이 왕래하고 마르코폴로 부자도 이 도로로 몽골에 이르게 된다.


이 외에도 칭기스칸의 리더십은 조직력과 부하육성으로 판가름이 났다고도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와 그리스 발칸반도, 모스크바, 베를린 등 엄청난 거리의 원정에도 정작 칭기스칸은 본토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십 수년 전 전쟁터에서 말을 돌보던 부하가 나중에 대군사를 지휘하고 전략을 구사하는 대장군으로 변모했고 그들에게 전권을 주어 인접국가에의 전쟁여부까지 맡겼다.


뛰어난 조직전략가인 칭기스칸은 '어떤 조직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 존재하지도 않았던 천호장(1000명의 군사를 제공할 수 있는 위치), 백호장, 십호장 체제를 구축했다.


◇정복자 아닌 비전공유자
1995년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000년간 인류사에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한 것은 단순히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세계역사 공헌은 과학과 기술, 교역의 장려다.


영토확장으로 각종 진기한 물건이 교류가 됐는데 칭기스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 당시 중앙아시아 상인이었던 위그르인의 교역할동을 보장했다. 또 칭기스칸은 실리적 정신에 입각해 이교도를 통해 국익을 증대시켰다.국교는 라마교였지만 모든 종교활동이 가능했다. 결국 개발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 교류를 촉진했고 동서교류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세계 인류사의 과학문명 발전을 300년 가랑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불어 그 큰 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은 현지인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다루가치나 자루가치 등을 보내 감시하거나 간섭하는 방식을 통해 피정복자들의 반발을 최소화함에 따라 정복지 백성들이 이 후 칭기스칸 전투에 스스로 나서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칭기스칸 사후에도 제국이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박성호 기자 vicman120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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