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영화 '하우스메이드' 스틸 컷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불안은 시대를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다. 스릴러 영화가 파고드는 그 서늘한 단면을 투과해 보면, 당대 대중이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고 무엇에 위협을 느끼는지가 적나라하게 읽힌다. 폴 페이그 감독의 영화 '하우스메이드'가 평단의 미지근한 반응에도 북미 관객을 사로잡은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가정 스릴러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속살에는 2026년의 달라진 시대정신이 펄떡이고 있다.
뿌리는 명백히 커티스 핸슨 감독의 '요람을 흔드는 손(1992)'에 닿아 있다. 하지만 도착지는 정반대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불안의 근원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했다. 이 영리한 배신이야말로 영화의 존재 이유다.
1990년대 미국 사회에서 가족의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낯선 외부인으로 인해 가정의 안온함이 깨지는 것이 큰 두려움이었다. '요람을 흔드는 손'에서 복수를 위해 가정부로 잠입하는 페이턴(레베카 드 모네이)은 이런 집단적 공포가 투영된 악녀였다. 누군가 나의 스위트 홈을 강탈할지 모른다는 당시 관객의 잠재적 불안이 캐릭터로 육화됐다. 서사의 결말은 필연적으로 침입자를 축출하고 가정을 사수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영화 '하우스메이드' 스틸 컷
'하우스메이드'가 포착한 불안의 본질은 다르다. 전과자 출신 가정부 밀리(시드니 스위니)는 위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놀라울 정도로 헌신적이고 순종적이다. 반면 고용주 니나(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성격 파탄자에 가깝다.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괴팍하고 신경질적이다. 하지만 이 기행은 광기가 아닌 비명이다. 남편 앤드루(브랜든 스클레너)의 정서적 학대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처절한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은 이 슬픈 진실을 은폐하는 화려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실상은 앤드루가 설계한 숨 막히는 가스라이팅의 현장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안식처가 도리어 탈출해야 할 '감옥'으로 전락한다. 이로써 불안의 화살표는 명확해진다. 진짜 위협은 담을 넘는 낯선 외부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통제하는 남편, 그리고 완벽해 보여야만 하는 강박적인 가정 시스템 자체가 공포의 숙주다.
불안의 진원지가 내부로 이동했으니, 생존을 위한 방정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서사는 자연스럽게 가정 수호가 아닌 탈출을 향해 질주한다. 지옥 같은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외부인을 기꺼이 공범이자 대리인으로 포섭한다. 침입자가 구원자로, 피해자가 설계자로 뒤바뀌는 이 전복의 쾌감은 시대의 결핍을 정확히 타격한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2018)' 등을 통해 스타일리시한 스릴러를 만들어온 페이그 감독은 이번에도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저택을 생활감이 거세된 쇼룸처럼 묘사한 점이 인상적이다. 잡지 화보처럼 비현실적인 공간은 관객에게 안락함 대신 정신적인 폐소공포를 안긴다. 앤드루가 구축한 가부장적 통제를 은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 '하우스메이드' 스틸 컷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기는 이 숨 막히는 설정에 방점을 찍는다. 극 초중반까지 1990년대 스릴러의 클리셰인 히스테릭한 아내를 그리며 관객의 편견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반전의 순간, 그 모든 신경증은 남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치밀한 생존 연기로 재정의된다.
결국 '하우스메이드'는 1990년대의 유산을 빌려와 현대의 환부를 찌르는 작품이다. '요람을 흔드는 손'이 가정의 붕괴를 경고했다면, '하우스메이드'는 그토록 목숨 걸고 지키려는 가정이 사실은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지 않냐고 되묻는다. 이 서늘한 질문이야말로, 영화가 단순한 복고풍 스릴러를 넘어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