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순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돌연 한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무역 합의 이전 수준으로 인상하겠다고 언급하면서 한미 통상 관계가 다시 격랑에 휘말리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회의 절차 지연을 문제 삼았으나 관세 인상의 구체적인 이유나 이행 시점 등이 명확하지 않아 우리 정부와 산업계에서도 그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최근 국회가 통과시킨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나 미국 빅테크 기업이 포함된 온라인 플랫폼법(온플법) 추진을 비롯해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둘러싼 정부 당국의 집중 조사 등 한국 내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됐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관계 기관의 후속 조치에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공동취재]
트럼프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한국 입법부가 한국과 미국과의 합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이에 따라 나는 한국에 대해 자동차, 목재, 의약품에 대한 관세와 기타 모든 상호관세(국가별 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나는 2025년 7월30일에 양국을 위한 위대한 합의를 했다"며 "내가 2025년 10월29일 한국에 있을 때 그런 조건을 재확인했는데 왜 한국 입법부는 합의를 승인(비준)하지 않았는가"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한국 국회의 승인은 한국이 미국에 약속한 투자를 이행하기 위해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하는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안'(대미투자특별법) 입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 간 안보·무역 분야 합의 내용을 정리한 공동 팩트시트에 따라 지난해 11월 해당 내용을 국회 의원입법으로 발의했다. 미국도 지난해 12월4일 관보 게재와 함께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15%로 소급 인하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현재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등에서 계류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적대로 한국 입법부의 비준이 늦어지는 것은 일부 사실이지만, 입법을 위해서는 의회 회기를 맞추고 여야간 합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관세 인상을 언급한 다른 속내가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 기업을 겨냥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의 규제 움직임도 그중 하나다.
이미 미 행정부는 한국 국회가 제정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과 국회에서 발의된 온라인 플랫폼 규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고, 미 투자업계 일각에서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촉발된 쿠팡에 대한 전방위 조사를 두고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인 쿠팡을 타깃으로 과도한 공세를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지난 23일에는 J.D. 밴스 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묻기도 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SNS에 "미국 정치권에서는 한국 정부가 쿠팡을 상대로 마녀사냥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랐고, 쿠팡 투자사들은 미 무역대표부(USTR)에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등 보복 조치를 요구해 왔다"며 "여기에 밴스 미국 부통령이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직접 쿠팡 문제를 언급한 데 이어 이번 관세 인상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통상 현안이 기업 이해관계에 의해 외교·통상 압박 수단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다만 현재까지 정부 당국은 한미 간 통상 문제와 무관하게 국내법에 따라 판단하고 대응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찰은 두 차례 출석 요구에 불응한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대표에게 3차 출석을 통보했고, 이번에도 응하지 않을 경우 체포영장을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로저스 대표에게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와 관련해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경위에 대해 조사할 방침이다.
송경희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위원장도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관련 조사에 대해 "국민에게 준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사고 이후 제대로 조치했는지를 엄격하게 보고 그에 맞는 처분을 내리겠다"며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 통상에 변수가 된다든지 하는 것들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세 문제가 표류할 경우 조사나 제재를 위한 동력이 위축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인상 결정이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기업들을 더욱 옥죄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면서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내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기업들의 경영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