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취재본부 박창원기자
제주 진료권역 분리가 사실상 확정되면서 '제주 1호 상급종합병원' 지정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정작 제주도청과 병원 측은 상급종합병원 지정이 '도내 완결형 의료'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지정만 되면 서울로 가는 환자가 사라진다"는 도민들의 기대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이다. 시작도 전에 우려가 앞선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우리나라 이른바 '빅5' 로 불리는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전경,
제주도 상급종합병원 추진 TF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상급병원으로 지정된다고 해서 서울로 가는 환자 유출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진짜 중증, 희귀질환에 해당하는 10~20%의 환자는 서울 '빅5'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지정 추진은 나머지 80%의 환자를 도내에서 소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행정 당국이 '완벽한 의료 독립'의 불가능성을 내부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최국명 제주대병원장 역시 지난 14일 간담회에서 "당장 원정 진료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해, 제주에 상급병원이 지정된다고 해도 당분간은 수도권 의료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을 시인했다.
실제 의료 신뢰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박형근 제주대 병원 공공의료 부원장에 따르면, 도내 환자 자체 충족률(RI)은 과거 85%에서 현재 82% 수준으로 하락했다. 상급병원 지정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도 환자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행정 당국의 이 같은 우려는 의료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확인됐다.
으레껏 이른 새벽, 제주공항 3층 출발 대합실에는 화려한 여행용 가방을 끄는 관광객들과 달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도리를 두른 채, 마스크를 쓰고 힘없이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각 비행기에 탑승해 서울 '빅5' 병원으로 향하는 원정 진료 환자들이다.
본지 기자가 2년여간 암 치료를 위해 통원하며 현장에서 만난 암 환자들에게 "만약 암이 재발하거나 지인이 암 판정을 받는다면, 제주 병원을 추천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무조건 서울로 가겠다", "절대 추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자는 현실적인 문제 제기와 대책을 주문하고 싶다. 경제적 여유가 있고 거동 가능한 사람들은 서울로 가지만, 정작 문제는 서울로 갈 형편이 안 되는 도민들이다.
제주에 상급병원이 지정된다면 '서울 갈 사람 잡는' 목표보다, '못 가는 사람을 확실히 살리는' 자체 능력부터 갖추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의사 수급을 넘어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다. 서울 '빅5' 병원은 제약사·연구소·의료기기 기업이 집적된 '바이오 클러스터'를 통해 신기술을 실시간으로 도입한다.
신약에 대한 임상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심지어 제약사는 연구간호사를 진료실에 배치해 의사의 연구를 돕는 인력까지 지원하며 최신 치료법을 연구한다.
생명의 실낱같은 확률에도 기대를 거는 중증 환자에게 이러한 신약 및 임상은 새벽에 뜨는 검붉은 태양보다 눈 부신 희망이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비용과 고생을 감수하더라도 수도권행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반면, 제주는 전후방 산업 생태계 없이 병원 건물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인프라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데 '상급' 간판만 달아 진료비 단가를 서울 수준으로 올리는 것은 도민 기만"이라며 "이는 경운기 엔진을 단 차에 벤츠 마크만 붙이는 격"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