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진로앤비즈 스페셜리스트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HSCEI) 주가연계증권(ELS)을 판매한 뒤 법령 위반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짜 녹취파일을 만들어 저장한 혐의로 NH농협은행 직원들이 형사 고소를 당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 관련 법령에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판매 전 과정에 대한 '녹취 의무'가 도입된 뒤 은행 직원이 시키는 대로 고객이 답변하는 식의 형식적인 녹취가 문제된 적은 있었지만, 아예 고객이 없는 상태에서 은행 직원들끼리 가짜 녹취파일을 만든 사례가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홍콩 ELS 상품 판매 이후 '투자자정보 분석결과표'나 '일괄 기명 및 서명 동의' 등 전자문서에 고객의 기명과 서명을 위조해 전산기록에 입력한 혐의를 받는 KB국민은행 직원들도 고소당했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2021년 6월 인천의 한 농협은행 지점에서 5000만원을 투자해 홍콩 ELS 상품에 가입한 A씨는 당시 각각 부지점장과 차장으로 근무하며 프라이빗뱅킹(PB) 업무를 담당했던 추모씨와 배모씨를 사전자기록등위작 및 위작사전자기록등행사, 컴퓨터등장애업무방해,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지난 2일 경기남부경찰청에 고소했다.
비슷한 시기 경북 소재 모 농협은행 지점에서 7600만원을 투자해 홍콩 ELS 상품에 가입한 B씨는 당시 차장으로 근무했던 강모씨와 성명불상의 PB 업무 담당자를 같은 혐의로 고소했다.
고소인 측 주장에 따르면 배씨는 2021년 6월1일 A씨에게 "기존 가입 상품의 만기가 도래했으니 지난번과 유사한 좋은 상품으로 재가입시켜드리겠다"며 홍콩 ELS 상품을 권유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A씨가 지점 방문이 어렵다고 하자 배씨는 비대면 가입을 권유해 승낙받은 뒤 상품 가입 절차를 진행했다.
그런데 2021년 5월10일부터 개정된 자본시장법 시행령과 하위 규정이 시행됨에 따라 홍콩 ELS와 같은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을 일반투자자에게 판매할 때 판매·계약 체결 과정을 녹취하는 것이 필수적인 의무가 됐다. 이를 위반하면 '불건전 영업행위'로 분류돼 '1억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된다.
A씨가 농협은행에서 받은 녹취파일 녹취록 발췌.
배씨는 이 같은 법적 제재를 피하기 위해 당시 부지점장이었던 추씨와 공모해 서로 역할을 분담한 뒤 실제 A씨를 대면해 상품의 위험성을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대면 설명이 이뤄진 것처럼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상황극을 연출한 뒤 이를 녹취한 파일을 농협은행 전산망에 저장한 혐의를 받는다.
B씨에게 홍콩 ELS를 판매한 강씨 역시 다른 직원들과 공모해 가짜 녹취파일을 만들어 은행 서버로 전송한 혐의를 받는다.
피해자 A씨와 B씨는 2023년 말부터 2024년 초 사이 뉴스를 통해 '홍콩H지수의 급락으로 원금의 40% 이상이 손실되는 대규모 원금 손실 사태가 현실이 됐다'는 사실을 접한 뒤 은행에 관련 자료를 요청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
고소인들은 2021년 당시 은행권의 과도한 실적 압박 상황을 고려할 때 피고소인들이 동일한 수법으로 녹취를 위작해 불완전판매한 사례가 더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무작위 표본 추출 등을 통한 녹취파일 대조 수사를 해줄 것을 경찰에 요청했다.
한편 경기도 소재 모 국민은행 지점에서 2021년 3월과 5월 각각 1억2000만원과 3000만원을 투자해 홍콩 ELS 상품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본 C씨는 당시 부지점장으로 근무하며 PB 업무를 담당했던 서모씨와 직원 김모씨를 사전자기록등위작 및 위작사전자기록등행사 혐의로 경기남부경찰청에 고소했다.
C씨는 김씨의 권유로 2021년 3월4일 1억2000만원을, 같은 해 5월3일 서씨의 권유로 3000만원을 각각 투자해 홍콩 ELS 상품에 가입했다.
그런데 사후에 전자문서로 작성한 일부 서류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김씨와 서씨는 불완전판매로 지적받을 것을 우려해 '투자자정보 분석 결과표' '다계좌 신규용 신탁 신규거래신청서' '일괄 기명 및 서명 동의' 등 서류를 다시 작성한 뒤 C씨의 기명과 서명을 위조해 내부 전산망에 저장한 혐의를 받는다.
'홍콩 ELS' 피해자들이 시위하는 모습. 연합뉴스
C씨는 자신이 가입한 홍콩 ELS 상품의 원금 손실 사태에 대한 뉴스를 접한 2023년 12월 처음 은행을 방문해 상품 가입 관련 자료를 받았다. 그리고 권리 구제를 위해 금융감독원에 제출할 추가 서류가 필요해 2024년 5월 다시 은행을 방문해 자료를 받았는데, 이때 2건의 상품 가입 때 작성한 '일괄 기명 및 서명 동의' 문서의 서명란에 다른 필적의 서명이 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밖에도 '투자자정보 분석결과표' '투자자정보 확인서' 등에서도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은 서명을 발견했다.
이번 고소는 직원들을 상대로 이뤄졌기 때문에 농협은행과 국민은행은 아직 고소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고소당한 직원들이 현재 근무 중인지도 개인정보보호 등 이유로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농협은행과 국민은행은 소속 직원들의 사용자로서 민사적으로는 함께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는 지위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허위 녹취파일과 위작된 전자기록으로 사무를 그르치거나 업무를 방해받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이 가입한 홍콩 ELS 상품은 홍콩H지수 등 3개의 주가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결합증권(DLS)으로, 기초자산 가격이 설정된 하한선 밑으로 하락하면 원금 전액 손실까지 발생할 수 있는 초고위험 상품이다. 국민은행은 시중은행 중 가장 많은 8조1972억원 상당의 상품을 판매했고, 농협은행은 2조1310억원어치를 판매했다.
현재 홍콩 ELS 사태와 관련해 여러 건의 민사소송과 분쟁조정이 진행 중인 가운데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11월 말 홍콩 ELS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국민·신한·농협·하나·SC제일은행 등 5개 은행에 총 2조원 규모의 과징금·과태료 1차 제재안을 사전 통보했다.
홍콩 ELS 피해자들을 대리해 민사 절차를 진행 중인 금융감독원 출신 최진홍 법무법인 YK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 대해 "고난도 금융상품에 대한 녹취 의무와 설명 절차는 그간 반복돼온 불완전판매를 차단해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핵심 통제 장치임에도, 일선 창구에서 실적 달성을 우선시하며 법령이 정한 절차를 번거로운 장애물로 인식해 온 관행이 결국 높은 신뢰성을 가져야 하는 금융기관 보관 자료의 조작이라는 중대한 범죄로까지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또 그는 "이번 사건은 특정 직원의 일탈에 대한 책임 추궁을 넘어 법과 제도가 실제 영업 현장에서 어떻게 왜곡·무력화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금융권 전반에서 업무 효율 또는 편의라는 이름으로 준법 의무가 소홀히 되지 않도록 하는 인식과 관행이 확고히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