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은주기자
연합뉴스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 위반을 밥 먹듯이 하고, 위반 이후에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 현재 모든 국민이 피해자인데 일일이 소송을 하지 않으면 보상이 안 되는 구조다. 집단소송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한 말이다. 최근 SK텔레콤, 쿠팡 등 기업들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이어지고 있지만 피해자들이 소송을 통해 배상받은 사례를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집단소송제도가 증권 관련 사건에만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소송은 일부 피해자가 소송을 내서 승소하면 판결 효력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다른 모든 피해자에게도 확정돼 일괄적으로 배상받을 수 있는 제도다. 국내에서 소비자 피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급돼 온 대규모 소송의 대부분은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만 배상받는 데 그치는 '공동소송'에 해당한다.
23일 정부와 법조계에 따르면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이뤄지고 있는 대규모 소송은 민사소송법상 공동소송으로, 집단소송과는 차이가 있다. 직접 소송 원고로 이름을 올려야 법원 판결의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문제는 피해 규모가 소액인 사건에서는 비용 대비 실익이 적어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재판에서 이겨도 소송 당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지 않은 만큼 비싼 변호사 수임료를 내고 수년간 소송을 할 이유가 크지 않다. 다수의 소비자가 피해를 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집단소송의 필요성이 제기돼 온 이유다.
우리나라에도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판결의 효력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단체소송이 존재하긴 한다. 다만 피해자들이 직접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는 없는 데다가, 금전적 배상을 받을 수도 없다. 소비자기본법과 개인정보호법에서 피해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제3의 단체만 피해자들을 대신해 소송의 당사자가 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또 손해배상청구는 허용되지 않으며, 권리침해행위의 금지와 중지만을 구하는 소송으로 한정한다. 실질적인 피해복구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쿠팡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계기로 개인정보 침해 분야에서 집단소송제 도입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일부가 소송을 내서 이기면 판결의 효력이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돼 전부 배상받을 수 있는 제도다.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에 집단소송제가 도입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 증권 분야만 집단소송제가 도입돼 실시되고 있다. 부실 공시, 시세조종 등으로 피해당한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2005년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이 시행됐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개인이 별도의 판결제외신고(옵트아웃)를 하지 않으면 대표 피해자가 낸 소송의 판결 효력이 구성원 전체에 미친다. 소송 참여자를 일일이 모집하지 않아도 되며 한 번의 판결로 광범위한 피해 구제가 가능하다. 이러한 형태의 옵트아웃 집단소송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특정 분야를 한정하지 않고 집단소송을 허용하고 있어 집단소송에서 패소한 기업은 막대한 배상금이나 합의금을 부담해야 해 경영이 위축되거나 파산에 이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집단소송이 기업들로 하여금 제품 안전기준을 강화하고 정보 공시를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예방적 효과가 크고, 관련된 다수의 청구를 하나의 소송으로 묶어 처리해 사법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해롤드 로저스 쿠팡 신임 대표가 1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쿠팡 침해사고 관련 청문회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5.12.17 김현민 기자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집단소송제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재계의 반대 속에 실제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2017년 집단소송제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도입 추진을 예고했었다. 공정위는 표시광고법과 제조물 책임법 등 분야에서 집단소송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업무계획을 발표했었다. 2020년 법무부는 전 분야에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하기도 했다. 22대 국회에서도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전 분야 개인정보 침해 사건에서 집단소송을 도입하자는 내용의 '집단소송법안(백혜련 의원 대표 발의)' '소비자집단소송법안(박주민 의원)' '개인정보 관련 집단소송법안(전용기 의원)' 등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물론 집단소송제가 전면 도입된다고 해서 피해자 구제가 효율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 소송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면 소송의 실익이 크지 않을 수 있어 집단소송이 활발하게 제기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증권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된 2005년 이후 첫 소송은 2009년에야 제기됐다. 그 이후 올해 7월까지 집단소송이 제기된 사건은 약 12건, 이 중 본안 판결이 나온 사건은 2건, 재판상 화해로 종결된 사건은 4건에 불과하다. 인구 차이를 고려해도 미국연방법원에 2021년에만 211건의 증권집단소송이 제기된 것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수치다.
우리나라에서는 집단소송의 소송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설정하고 있다. 집단소송을 걸 수 있는 대상은 ▲유가증권신고서 등 발행시장 공시서류의 부실기재 ▲사업보고서 등 유통시장 공시서류의 부실기재 ▲내부자거래·시세조종 행위 ▲감사인의 위법행위 등으로 제한돼 있다. 소송을 걸 수 있는 집단으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도 까다롭다. 50인 이상이 참여해야 하고, 행위 당시 기준으로 구성원이 보유한 증권 합계가 피고 회사 발행주식 총수의 1만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 여기에 법률·사실상의 핵심 쟁점이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돼야 하고, 집단소송이 개별 소송보다 효율적인 수단임 또한 입증해야 한다.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곧바로 본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법원은 소장 심리에 앞서 소송허가 여부를 먼저 판단하는데, 이 허가 결정과 본안 판단 모두 각각 3심까지 가능하다. 법원에 소송 허가 결정을 받는 데에 기업이 즉시 항고와 재항고가 가능해 소송해도 되는지를 판단하는 데에만 수년이 걸린다. 사실상 '6심제'로 운영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