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진기자
권현지기자
연말 기업가치 1조원을 넘는 대형 기업들의 상장이 잇따르면서, 침체해 있던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 모처럼 온기가 돌고 있다. 특히 내년엔 기업공개(IPO) 시장이 더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되며, 그동안 회수 가뭄을 겪어온 벤처캐피털(VC) 업계에서는 '수확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연말 조 단위 몸값의 '대어'인 리브스메드와 세미파이브가 연달아 상장에 나선다.
의료기기 기업 리브스메드는 24일 코스닥 시장에 입성한다. 지난 15∼16일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공모주 청약을 진행한 결과, 390대 1의 경쟁률로 마감했다. 국내 바이오 및 의료기기 분야, 특히 외과 수술기구 영역에서 시가총액 1조3000억원 규모의 기업이 코스닥에 상장하는 건 흔치 않은 사례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 기업 세미파이브는 오는 29일 상장하며 올해 마지막 코스닥 시장 상장사로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지난 10∼16일 진행한 수요 예측에는 국내외 기관투자가 2159개 사가 참여해 436.9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수요 예측에 따른 총 공모액은 1296억원, 상장 후 예상 시가총액은 8092억원이다. 상장 대표 주관사인 삼성증권과 UBS증권은 대만의 패러데이(Faraday), 알칩스(Alchip), GUC 등과의 비교 평가를 통해 세미파이브 적정 기업가치를 약 1조490억원으로 산정했다. 최근 IPO 시장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상장 당일 시가총액은 1조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말 두 대어가 상장에서 나서며 VC 업계엔 화색이 돌고 있다. 리브스메드는 2011년 LB인베스트먼트의 시드(Seed) 투자를 시작으로 올해 2월 프리IPO까지 약 787억원 이상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 기업에 투자한 VC는 ▲타임폴리오자산운용 ▲원익투자파트너스 ▲미래에셋벤처투자 ▲K2인베스트먼트파트너스 ▲스톤브릿지벤처스 등이다.
세미파이브 상장을 통해 회수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VC도 다수다. 세미파이브는 2019년 미래에셋벤처투자 등이 투자했으며, 지금까지 유치한 금액은 2400억원 규모다. ▲LB인베스트먼트 ▲한국투자파트너스 ▲SBVA ▲SV인베스트 등 다수의 기관투자가 및 VC가 참여했다.
내년엔 무신사, 구다이글로벌, 업스테이지, 아델 등 다수의 기업이 상장문을 두드릴 것으로 전망된다.
패션 플랫폼 기업 무신사는 한국투자증권,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 등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상장 작업에 들어갔다. 시장에선 무신사의 기업가치를 10조원으로 보고 있다. 주요 투자사는 DSC인베스트먼트, LB인베스트먼트 등이 있다.
'조선미녀' '티르티르' 등 인기 뷰티 브랜드를 앞세워 급성장한 구다이글로벌도 조만간 상장 주관사 선정에 나설 계획이다. 해외에서 급성장하면서 몸값이 10조원까지 거론되고 있다. IMM인베스트먼트,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등을 비롯해 JKL파트너스, IMM PE 등 다수의 사모펀드 운용사도 뛰어들었다.
바이오 섹터의 회수도 기대된다. 치매 치료제를 개발하는 아델은 최근 글로벌 빅파마 사노피를 대상으로 1조5000억원 규모의 빅딜을 체결하며 기술 경쟁력을 입증했다. 내년 IPO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아델을 비롯해 회사 포트폴리오 중 약 25%를 바이오 섹터에 투자하는 스톤브릿지벤처스 관계자는 "아델, 인제니아테라퓨틱스, 넥스아이 등이 내년 본격적으로 회수 모드에 들어가 바이오 섹터 회수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IPO 시장으로 시중 자금이 몰리면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미래에셋벤처투자다. 리브스메드 시리즈B라운드에서 30억원을 투자한 미래에셋벤처투자는 지분 1.06%를 보유하고 있다. 리브스메드가 상장 이후 시가총액 1조원을 달성할 경우 미래에셋벤처투자는 회수 멀티플 4배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에셋벤처투자는 세미파이브 상장을 통한 회수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세미파이브에 3번에 걸쳐 총 363억원을 투자했으며, 지분율은 약 13%로 미국 반도체 설계 회사 사이파이브(17.69%)에 이은 2대 주주로 있다. 미래에셋벤처투자는 세미파이브를 통해 최소 1000억원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몰로코와 스페이스X의 상장에 따른 투자금 회수도 가능하다. AI 광고 솔루션 기업 몰로코는 내년 나스닥 상장을 준비 중으로, 미래에셋벤처투자는 단일 기업 최대 규모인 723억원을 투자했다.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벤처투자 등은 스페이스X에 투자했다. 투자 당시 스페이스X의 몸값은 187조원이었으나, 스페이스X의 상장 시점의 몸값은 2200조원까지 거론된다. 이 경우 미래에셋이 보유한 지분 가치도 10배 가까이 오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준석 한양증권 연구원은 "미래에셋벤처투자의 주요 포트폴리오 회수가 본격화하는 내년에는 다수의 IPO 및 투자 회수가 동시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영업이익이 1000억원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한다"고 전망했다.
주요 투자사들의 잇따른 상장에 따른 대규모 회수금은 국내 벤처투자 시장의 강력한 선순환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엑시트(투자금 회수)로 확보한 자금이 다시 신규 펀드로 유입되면서 유망 기업 투자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VC는 펀드 결성 시 운용사(GP) 고유자금을 일정 부분 투입하는데, 회수금이 급증하면 VC들이 GP 출자 비율을 대폭 높일 수 있는 여력이 확보된다. 한 대형 VC 관계자는 "지난 2~3년간 이어진 IPO 시장 침체는 VC들의 실질적인 자기자본 투자 여력 감소로 이어졌다"며 "최근 엑시트가 활발해짐에 따라 회수 자금이 대형 펀드의 자본금으로 다시 유입되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정부가 추진 중인 국민성장펀드 조성은 시장 활성화 기대감을 한층 더 키우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를 중심축으로 여러 민간 하위 펀드들이 결성될 예정인 만큼, VC들이 확보한 자금이 민간 출자분으로 재투입되는 '선순환 모델'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국민성장펀드로 모태 자금 역할을 하게 되면, GP들도 그 회수한 자금으로 출자 비중을 높여 다시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