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예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88 서울올림픽 굴렁쇠와 의상 스케치. 연합뉴스
PC통신과 한글 워드가 국가유산으로 지정될 전망이다. 제작·형성된 지 50년이 채 되지 않은 이른바 '우리시대 유산'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1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26년 주요 업무계획'을 발표하며 "'우리시대 유산(예비문화유산)'을 중점적으로 발굴해 향후 지정·등록 유산으로 선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제도권 문화유산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를 적극 발굴하겠다는 설명이다.
중점 발굴 분야는 여섯 개다. 디지털·정보화 유산(PC통신, 한글 워드 등)을 비롯해 대중문화유산(영화·대중가요·드라마 초기 자료), 민주화·현대사 유산, 독립운동가 생가, 일제강제동원 관련 유산, 근현대 건축·산업유산(철도·조선소·탄광 등) 등이다.
재난·기억유산도 발굴 대상에 포함된다. 사회적 재난 기록을 보존해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겠다는 취지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등의 기억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방침이다.
국가유산청은 내년 6월 대국민 공모를 진행하고, 9월 우수 사례를 발표한다. 12월에는 특별 사진전과 학술대회를 연다. 예비문화유산 제도는 올해 처음 도입됐다. 지난달 우수 사례 열 건을 처음 선정해 기념 사진전을 열었으며, 현재 약 2000건이 목록화돼 있다.
예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치료 및 간병도구. 연합뉴스
올해는 이 제도를 통해 근현대 경관자원 마흔세 건도 추가로 발굴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형성된 경관 가운데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을 선별했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근현대 명승 지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허 청장은 "기존 국가유산이 주로 조선시대 이전이나 일제강점기 유산에 집중돼 있었다면, 예비문화유산은 현대사와 일상생활에 밀착된 자산까지 포괄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1970~1990년대 산업화·민주화·정보화 시대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겠다"고 말했다.
민속유산 분야에서는 사찰 해우소와 놀이도구, 생산·산업 관련 유산을 발굴한다. 사찰 해우소는 전통 건축 기법과 위생 관념을 함께 보여주는 사례로, 일상문화의 맥락에서 주목된다. 놀이도구는 한국인의 여가와 놀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다.
자연유산 분야는 동산형 지질유산과 해양동식물유산, 근현대 경관자원(명승)을 포함한다. 동산형 지질유산은 이동이 가능한 암석·화석 표본을 뜻하며, 해양동식물유산에는 독도 강치와 점박이물범 등 멸종위기 해양생물의 표본과 서식지가 포함된다.
무형유산은 생활밀착형 종목과 구전전통을 중심으로 조사한다. 지역 대학이 참여하는 전국 단위 일제 조사를 통해 무형유산 공동체의 현황을 파악하고, 전통지식과 구전·전통표현, 생활관습, 사회적 의식, 전통놀이·축제 등 분야를 연차적으로 추진한다. 기초조사 과정에서 축적된 기록화 자료는 방송 전문 작가 등과의 협업을 통해 대중문화 콘텐츠로 확장할 계획이다.
예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의성 자동 성냥 제조기. 연합뉴스
국가유산청은 발굴의 범위도 넓힌다. 정책의 핵심축은 디지털·정보화 유산이다. 1980~1990년대 PC통신(천리안, 하이텔 등), 한글 워드프로세서 초기 버전,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 초기 인터넷 포털 자료 등이 대상이다. 디지털 시대 전환기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한다.
대중문화유산은 한국 영화·드라마·대중가요의 초기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진다. K컬처의 원형을 추적하는 차원에서 1960~1980년대 영화 필름, 방송 대본, 음반 원판 등이 포함된다.
근현대 건축·산업유산은 철도역사, 조선소, 탄광촌, 방직공장 등 산업화 시대의 유산을 다룬다. 특히 서울역(구 서울역사)은 올해 준공 100주년을 맞아 내년부터 보수·복원이 추진된다. 원형 고증 연구(2025), 안전진단 및 실시설계(2026), 보수·복원 공사(2027~2028) 순으로 진행한다.
허 청장은 "우리 세대가 경험한 문화와 기술도 미래 세대에게는 중요한 유산"이라며 "디지털 시대의 변화상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국가유산청의 책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