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기자
"한국은행 총재로서 말씀드리건대, 외환 시장에 위협을 주는 수준으로 한은이 돈(대미투자)을 지급할 생각이 없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7일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에서 최근 원화 가치 절하(원·달러 환율 상승) 요인 중 하나로 '매년 200억달러 대미투자로 달러 유출'이 거론되는 데 대해 "연 200억달러는 '상한액'으로, 외환시장에 주는 영향이 없을 때 그렇게 하게 돼 있다"며 "특히 이번에 국회에 제출된 법안을 보면, 한은이 외환보유고 이자수익과 배당수익으로 (이를) 공급해야 하는데, (전제 조건은) 외환시장에 안정을 주는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이를(대미투자를) 담당하고 있는 게 한은이기 때문에 이것이 원인이 돼 장기 절하가 된다, 이런 견해는 과도한 생각이라고 본다"며 "한은이 책무로서 그런 일이 이뤄지지 않도록 외화 송금 액수 등을 정부와 (잘) 얘기하겠다. 한은이 갖고 있는 외환보유액이므로 한은이 잘 관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7일 오후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점검' 기자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은행
한은에 따르면 올해 1~11월 중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1%(전년 동기 대비)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둔화했다. 그러나 지난 10월과 11월 각각 2.4%를 기록하는 등 최근 2% 중반으로 높아졌다. 이는 여행 관련 서비스가격 일시 상승, 기상 여건 악화에 따른 농축수산물가격 상승, 고환율로 인한 석유류 가격 상승 등이 작용한 결과다.
식료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은 상반기 중 2% 내외에서 움직이다가 지난 8월에는 서비스 물가가 통신 요금 일시 할인 하방 요인에, 10월에는 여행 수요 급증의 상방 요인에 영향을 받았다. 최근 근원물가 상승률은 다시 2.0%로 낮아졌고, 여타 기조적 물가 지표들도 대체로 안정 흐름을 이어오면서 지표들의 평균치가 2% 부근(11월 2.0%)에서 유지되고 있다.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내수 개선세에도 공급 측 압력이 줄면서 지난달 경제전망에서 제시한 2.1%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원·달러 환율이 현재 같은 높은 수준을 지속한다면 물가 상승률이 지속될 가능성 있어 유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은은 현재와 같은 1470원 전후의 고환율이 지속될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0.2%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봤다. 내년 전망(2.1%)에 대입하면 2.3%까지 가능하단 얘기다.
이 총재는 "현재 환율 수준은 외채를 갚지 못했던 외환위기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나,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에선 또 다른 면에서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고 걱정이 크다"고 짚었다. 그는 "고환율은 이익 보는 사람과 손해 보는 사람을 나눈다. 수출이 잘돼서 경제가 유지되는 반면 수입업체는 어려움을 겪는다"며 "내수, 자영업자와 건설 부분의 어려움을 키워 성장 양극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내년 소비자물가의 상방 요인인 환율과 하방 요인인 국제유가 추이. 한국은행
이 총재는 현재 환율의 변동성뿐 아니라 수준(레벨)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원화만 유독 절하 국면으로 간 데는 수급 쏠림 등 내부적 요인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내부적 요인으로 불필요하게 (절하 폭이) 큰 부분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변동성뿐 아니라 레벨에서도 조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짚었다.
이런 측면에서 '국민연금 정책 조율' 결정은 수급 개선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민연금은 최근 중장기 수익률과 시장 여건을 함께 고려, 운용지침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이 거시경제적 영향을 고려해 정책 조율을 해주시기로 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정부 대책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수급 요인 개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근 환율 상승을 두고 '서학개미(해외주식에 투자하는 개인) 탓만 한다'는 시각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탓이 아닌 원인 규명이란 설명이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 환율이 많이 절하된 데는 한미 간 경제성장률 차이와 금리 격차, 국내 주식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이 장기적 요인으로 작용한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면서도 "(이들 요인을) 고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 사이 정책담당자로서 시간이 걸리는 문제만 말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수급 요인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런 원인 분석을) 어느 특정 그룹을 탓하는 걸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웅 부총재보, 이지호 조사국장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점검' 기자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은행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한국은행, 국민연금 4자 협의체가 논의 중인 국민연금 '뉴 프레임워크'는 결론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봤다. 이 총재는 "기본적으로 문제는 인식하고 있으나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부처마다 다르고 복지부·국민연금이 최종 결정해야 해 하루 이틀 사이 이뤄질 건 아니다"라며 "도입되기 전이라도 시장을 안정시킬 정책을 하는 가운데 뉴 프레임워크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은은 결론 도출을 위해 이론적 근거 등을 연구해 복지부에 제공할 방침이다.
이 총재는 뉴 프레임워크에서 다뤄졌으면 하는 내용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그는 "(국민연금의) 환헤지 개시 및 중단 시점에 대한 의사결정 방식이 투명해 범위가 정해지면서 시장 기대가 형성되는 문제가 있으니 전략적 불투명성을 강화했으면 한다"며 "현재 원화로만 보는 국민연금 성과와 수익률에 대한 변화도 필요하다"고 짚었다. 그는 "해외에 나갈 때는 수익률이 높게 보여 좋을지 모르나, 다시 가져올 때 원화 절상 시 수익률이 떨어지게 된다"며 "5~6월 대만 보험사들이 환 헤지 없이 대규모 해외투자에 나섰다가 수출이 늘면서 통화가 절상돼 환 손실이 컸던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는 개인투자자도 함께 고민할 문제라고 이 총재는 짚었다.
'큰 손' 국민연금의 거시적 파급 효과 역시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총재는 "10년 전 개인의 해외투자가 적었을 땐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가 (우리나라 전체의)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나, 최근엔 국내 주식시장 유입, 국내 고용 등 측면에서 거시적 파급 효과를 고려하면서 자산운용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