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책무구조도]②'취지는 좋지만' 현장 실무진이 말하는 명과 암

증권사·자산운용사 대상 익명 설문해보니

"실정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지속적인 관리가 가능할지 걱정이다."

"수백에서 수천개에 이르는 조치활동의 이행, 점검 여부에 관해 실질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결국 형식적 판단에 그칠 것이다."

올해부터 시행된 '책무구조도'를 둘러싼 각종 우려는 해당 업무를 맡은 금융투자업계 실무진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이들은 반복되는 금융사고를 막기 위해 내부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규제당국의 모호한 세부 기준, 개별회사 적용 시 한계점, 시스템 도입을 위한 억대 비용과 인력 부담 등에 고충을 토로했다. 자칫 책무구조도가 '실효성 없는 껍데기 제도', '책임전가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계감도 제기된다. 보다 구체적인 가이던스, 기준을 마련하는 동시에 현장 목소리를 반영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22일 아시아경제신문이 지난 4~11일 국내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 28곳의 책무구조도 관련 실무진 29명을 상대로 실시한 익명 설문조사에 따르면 책무구조도의 도입 목적과 관련해 실질적 내부통제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매우 공감' 응답자는 4명 중 한명꼴(24.1%)에 그쳤다. 나머지 75.9%는 제도의 취지와 필요성은 이해하나 실제 현장 적용에 일부 한계가 있다는 뜻에서 '어느 정도 공감한다'고 답변했다.

이번 조사에서 실무자들은 가장 중요한 책무구조도 도입 목적(이하 복수응답)으로 ▲업무 책임과 권한의 명확화(79.3%) ▲내부통제 고도화(44.8%) 등을 꼽았다. 다만 응답자 10명 중 6명 안팎은 과중한 업무 및 리소스 부족(65.5%), 형식적 문서화에 그칠 수 있다는 점(58.6%) 등을 우려했다. 도입 초기인 현시점에서 느끼는 현실적인 어려움으로는 ▲시간, 인력 등 행정적 부담(65.5%) ▲시스템 정비 부담(58.6%) ▲기존 보고체계 및 규제와의 충돌(27.6%) ▲부서 간 조율 어려움(27.6%) 등이 언급됐다.

설문에 참여한 A사 관계자는 "컨설팅 비용, 시스템 도입 비용이 몇억 대로 든다"며 막대한 비용 부담을 토로했다. B사 관계자는 "외국 제도를 모델로 삼아 도입했기에 국내 실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내부적으로는 실무 담당자 인력 부족 등이 문제"라고 말했다. C사 관계자는 "세부 지침이 부족한데다 현실적으로 책임 구분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면서 "책무 변경 시 이사회 의결 후 7영업일 내 제출하라는 것도 기한이 촉박하다"고 어려움을 전했다.

책무구조도는 각 분야의 내부통제, 리스크를 임원 별로 명확히 해 사고 발생 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제도다. 금융투자사(자산총액 5조원 이상·운용재산 20조원 이상)의 경우 금융지주사, 은행 등에 이어 이달부터 공식 도입됐다. 이번 설문에 응답한 28개사 중 10개사는 이달부터, 절반 이상인 15개사는 올 초 시범운영 때부터 참여 중이다. 3개사는 도입을 앞두고 있다.

특히 증권사 등 금융투자업계의 경우 타 금융업권보다 업무 종류가 더 세분화돼 있는 데다, 상품 리스크 및 이해상충 리스크가 복잡한 탓에 한층 더 책무를 명확히 나누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손실 가능성이 있는 투자성 상품을 주로 제조·판매·중개하는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가 많고, 신규 상품이나 서비스의 출현도 빈번한 등 업 자체의 고유 특성이 존재한다"며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제도 운영의 효율성 확보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각자대표 체제'와 '대표이사의 이사회 의장 겸직' 등을 증권업계 대표적 개선 사항으로 꼽은 바 있다.

제도 도입 초기인 현시점에서 각사 실무진이 느끼는 가장 큰 제도 정착 걸림돌은 무엇일까. 절반 이상의 응답자들은 '실무 중심의 운영방안 부족(51.7%, 복수응답)'을 꼽았다. 이는 법상 책무와 실제 업무 간 괴리로 인한 현장의 혼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D사 관계자는 "법령에서 정한 부분을 실무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모호하거나, 업계 공통 적용되기 어렵거나, 형식적인 부분들이 있다"며 "보다 구체적이고 실행력 있는 방안이 제공되면 좋겠다"고 했다.

조직 내 불명확한 책임 구조, 변화에 대한 내부 저항, 규제 당국의 구체적인 가이드 부족을 지적한 의견도 각각 30%대를 기록했다. E사 관계자는 "컨설팅에 의존하고 있으나, 당국의 방향과 맞게 가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F사 관계자는 "규제기관에서 제공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의 범위에서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면서도 "현업과 괴리가 있다. 예를 들어 '책무의 중복이 발생하면 조직개편을 해 해소해야 한다'는 취지의 가이드는 현실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증권사의 경우 책무 배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임원들로 인해 실무진의 업무 스트레스가 큰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현장에서는 명확한 필벌 기준이 세워지는 동시에, 실무 중심의 실행 방안, 모범 사례, 운영 측면에서의 가이드라인 등이 추가로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이번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책무구조도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필요한 요소(단일응답)로 '실무 중심의 실행방안'(34.5%) '유사사례 및 모범안 공유'(34.5%)를 가장 많이 꼽았다. '명확한 당국의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20.7%를 차지했다.

별도 서술형 의견에서도 명확한 기준, 구체적인 사례 등에 대한 요구가 잇따랐다. G사 관계자는 "임원 등의 내부통제 관리의무 위반 여부에 관한 명확한 판단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며 "(현 수준으로는) 형식적 판단에 그칠 우려가 있다"고 꼬집었다. 일례로 금융사지배구조법 제35조의2는 내부통제 등 관리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조치의 감면 고려 요인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수백, 수천개에 이르는 부서별 조치 활동·이행 여부를 살펴야만 해 결국 실질적 판단이 쉽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동시에 금융당국이 임원 등에 대한 행정제재를 남용하지 않도록 당국과 업권 사이 합의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와 함께 ▲주기적인 표준안 제정 ▲내부통제 관리의무 위반이나 '상당한 주의' 여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던스 및 사례 ▲계도기간 확대 등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다수 확인됐다. 운영 측면에서는 당국이 ▲책무구조도 관련 조직 내 인원·예산 등에 대한 최소 기준 및 세부 운영 가이드를 제공해 각사별 운영 강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H사 관계자는 "금융환경은 내부통제 강화 추세이고 관련법령과 제도도 그런 방향에 맞춰 변화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내부통제는 투자보다는 비용이라는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인적, 물적 자원 지원에 대해서도 금융당국에서 강제적으로 이행될 수 있는 가이드를 심어주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성구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실제 책무구조도를 작성하는 업무에 관여해 보니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면서 "제도 시행 초기에는 책무구조도의 운용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실무적 문제점을 관찰해 제도를 보완하는 것을 목표로 제도를 운용하고, 필요시 제도를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사회 수시 개최와 같은 업무 부담, 리더십 공백 등의 우려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책무구조도 도입의 원취지를 살리되, 아직 제도 도입 초기인만큼 추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증권자본시장부 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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