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화기자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리더가 되자."
목재 제조업계의 최고수(最高手) 이성영 동화기업 기술혁신실장(상무)은 "제조업은 다른 사람과 함께 협업해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인성을 들여다봐야 하고, 인성만 좋고 실력은 부족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화기업은 ?1948년 설립돼 PB(파티클보드), MDF(중밀도 섬유판), 강화마루 등 보드 제품과 바닥재, 벽재와 같은 건장재 제품을 생산하는 업계 수위 기업이다. PB와 MDF는 원목을 가공하고 남은 자투리 자재나 폐건축 자재 등을 곱게 부숴 접착제로 반죽해 고온고압에서 굳힌 것이다. 합판보다 밀도가 높다. PB보다 MDF가 더 튼튼한 보드다.
이 실장은 1994년 한솔포렘에 입사해 지난 1월로 근속 30년을 채웠다. 한솔포렘은 2003년 한솔홈데코로 사명을 바꾸고, 2005년 한솔홈데코 아산 MDF 공장을 동화기업이 인수하면서 당시 아산공장에 근무하던 이 실장도 동화기업 소속이 됐다.
그해 한솔그룹 신입 공채를 통해 130명을 뽑았는데, 한솔포렘에는 30명이 그와 함께 입사했다. 지금까지 3명이 남았는데, 모두 동화기업으로 옮겨온 사람들이고, 한솔에 남았던 사람들은 운명처럼 그룹의 부침과 함께 모두 회사를 떠났다. 남은 동기들은 지금도 가끔 모여 옛 추억을 나눈다.
1968년생 87학번인 그는 서울대학교 임산공학과를 졸업했다. 임학공학과가 나무를 심어서 키우는 목적이라면, 임산공학과는 키운 나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 가치 창출에 목적을 둔 학과로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신생 학과였다. 졸업생 대부분이 농촌진흥청이나 산림청, 농협 등 공공기관에 취업하고 그 또한 농협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산업현장을 선택했다. 학교에서 배운 전문지식을 실제 산업현장에서 적용해보고 싶은 의욕도 있었지만, 대학교 3학년 때 실습 나왔던 한솔포렘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솔포렘 직원식당에 거대한 원목을 반으로 잘라 놓은 식탁이 있었는데, "이 회사에서 일하면 저런 원목을 사용하는 현장에서 일할 수 있으니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아산공장에 배치받은 그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수목학과 섬유판 등 제지나 목재와 관련된 모든 지식이 업무에 도움이 됐고, 현장에서는 기계와 설비, 전기, 생산, 연구 등 엔지니어로서 습득해야 할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그러다가 해외로 나가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말레이시아 주재원으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그에게 영향을 큰 미쳤던 사람은 아산공장 김철산 기술개발팀장이었다. 당시 제조라인의 설비는 독일 등 선진국에서 들여온 것이 많았기에 신규 설비 교체나 정비를 하러 방문한 외국 엔지니어들과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팀장은 "너의 경쟁 상대를 내부에서 찾지 말고 선진기술을 전파하러 온 저 친구로 삼으라"면서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도 끊임없이 연마하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김 팀장은 "시키는 것만 하지 말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도 했다. 김 팀장은 1999년 '신지식인 1호'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당시 정부가 지식사회 건설을 국정 목표로 내걸고 선정했던 심형래, 안철수, 조태훈(번개반점 사장), 김철산 등 신지식인 1호이기도 하다.
김 팀장의 신지식인 1호에는 아산공장 기술개발팀 5명으로 구성된 '활화산'팀이 포함된다. 김 팀장은 원어로 된 기술 서적과 학술지, 영어로 된 논문 등을 읽고 수시로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당시 활화산 팀원 중 막내였던 이 실장은 "굉장한 자극제가 됐다"면서 "시간이 흘러 내가 저 위치에 섰을 때 글로벌 시장에서 실력으로 밀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해외주재원 생활은 그에게도, 가족에게도 기회가 됐다. 초등학생으로 한국에서 사고뭉치였던 두 아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친구조차 없는 낯선 외국에서 똘똘 뭉치면서 가족의 유대관계가 끈끈해졌다. 또 현지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인성과 인적 네트워크를 중시하고, 놀이 위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성교육에도 큰 도움이 됐다. 특히 그는 한국의 입시경쟁을 겪지 않게 했던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지금 두 아들이 한국 기업에서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직원으로 평가받으며 일하고 있는 것도 그 영향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내 일에 만족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일에 푹 빠져 30년을 목재와 함께 현장에서 살았다. 절반은 한국에서, 절반은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의 현지 공장에서 일했다. 동화말레이시아에서는 보드 생산팀장을, 베트남의 'VRG동화'에서는 생산본부장과 법인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는 동화기업의 생산·설비·안전·환경·품질·연구 등 보드 제조의 모든 과정을 통합·분석하고, 내외부의 우수한 경험과 기술을 소개·적용해 생산기술의 상향 표준화를 책임지는 기술혁신실을 이끌고 있다.
베트남 VRG동화에서 6개월간 공장에서 갇혀 지냈던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다. VRG동화는 동화기업과 베트남 국영기업인 VRG가 51:49의 지분비율로 합작한 기업으로, 운영은 동화기업이 맡았고, 당시 그는 대표이사였다. 2022년 2월 코로나19가 베트남을 덮치면서 베트남 정부는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지역봉쇄' 정책을 추진한다. 이동이 전면금지되면서 호찌민에 위치한 VRG동화 공장에 18명의 한국 직원과 베트남 현지 직원 482명 등 500명의 임직원이 갇히게 된다.
호찌민 시내에 사는 가족들도 만날 수 없었고, 오직 공장 안에 갇힌 직원들과 함께 생존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공장 안 사무실에 5명, 50명 정원의 기숙사에 80명의 잠자리를 마련했고, 나머지는 공장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야 했다. 외부에서 고작 도시락만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 세끼를 도시락으로 때워야 했다. 야적장에 도시락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러면서 일주일에 세 번씩 코로나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했으며, 의심 증상만 나타나면 격리시설로 보내야 했는데, 다행히 공장에서 의심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호찌민 시내 남아있는 가족의 안부도 걱정이었다. 전화로 "코로나 기운이 있어도 검사를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시 의심 증상만 나타나면 무조건 격리시설로 끌려가야 했다. 체육관 같은 격리시설로 끌려가면 거기서 증상이 더 악화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고, 백신도 보급되지 않아 치료를 거의를 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됐기 때문이다. 결국 사망하면 바로 화장장으로 사체를 가져가 화장한 후 유족에게 통보만 해주던 공포의 시기였다.
2022년 8월. 6개월 만에 봉쇄가 풀렸다. VRG동화가 남베트남 지역에서 규모가 큰 기업이면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기업 중 한 곳이었기 때문에 백신도 가장 먼저 공급받는 등 지방정부에서 나름 신경을 많이 써줬다. 그렇게 해방된 그들에게 회사는 성과급으로 보답했다. 살이 빠져 해골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모두가 밝은 모습으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3월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면서 불황이라는 또 다른 고난을 맞닥뜨리게 된다.
베트남에서 생산된 MDF는 가구로 만들어서 65%를 미국에 수출하는 데 미국의 불황으로 소비가 얼어붙자 베트남 경제도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다. 매년 6~7%나 성장하던 베트남 경제성장률이 2.4%로 떨어졌고, 동화기업도 직격탄을 맞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기술혁신과 원가절감 노력을 통해 영업이익을 창출해 경쟁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실장은 "세상은 한치의 배려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시기"라면서도 "그래도 가장 힘든 시기는 지금"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과거에는 개선과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고 차별화를 통해 경쟁사와 격차를 벌려 성장해 나간다는 자신감과 기대가 있었다"면서 "지금은 무엇을 해도 역부족으로 느껴질 만큼 미래가 예측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대외 요인의 벽이 너무 높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데도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30년 넘게 일하다 보니 기계·설비·생산·안전·환경·품질 등 여러 방면에서 전문가가 됐고, 지게차 등 장비도 다루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다. 다만, 더 잘하는 기술자에게 맡기는 것이 효율이 높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다. 코로나 시기와 같은 다급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 이 실장은 일본 도요타 공장에 연수를 다녀온 후 그들의 생산 시스템(Toyota Production System·TPS)을 벤치마킹, 국내 각 공장의 생산방식과 접목하기도 했다.
신지식인 1호 탄생의 계기가 된 '활화산' 팀의 전통은 여전히 동화기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보드 테크니컬 콘퍼런스'가 바로 그것이다. 동화기업은 연 1회 국내외 보드 사업장의 대표와 주재원들이 함께 모여 초격차 제조 경쟁력 확보 방안 등을 주재로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 콘퍼런스의 실질적 주창자가 이 실장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국제 경쟁력을 갖춘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실력을 쌓으라"고 조언했다. "선진 해외 기술자들과 겨뤄도 뒤지지 않을 만큼 목재와 설비에 대한 전문성, 언어 능력, 해외 문화에 대한 이해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꾸준히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요 간부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외 근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저가로 국내 시장을 점유한 태국산 PB에 대한 우려도 쏟아냈다. 그는 "세계에서 한국산 보드가 가장 강하고, 냄새도 적은 친환경 제품이며, 가장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라고 전제한 뒤 "보드 제품은 국내 주거환경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만큼 친환경성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그런데 최근 제대로 된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은 제품이 유입돼 국내 시장을 잠식해 안전한 주거환경 침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PB 시장은 동화기업이 13%, 성창기업이 12%를 점유하고, 70%가 태국산, 기타 5%가량을 동남아산 PB가 점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수입 PB의 품질을 신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실장은 "규격미달의 제품이 상당히 많고, 유해화학물질이 포함된 제품이 KS 심사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서 "제도적으로 수입 제품에 대한 검역(검사)이 보다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수의 한마디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 관해 공부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PB 한장을 만들 때도 그렇다. 원재료는 목재이니 목재에 대해 알아야 하고, 잘게 자른 목재를 접착제로 붙이는 것이니 화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주요 공정은 설비가 진행하는데 설비는 기계와 전기를 통해 굴러간다. 이런 과정들을 모두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최종제품이 생산될 수 있다. 기술직이든, 관리직이든 원재료와 공정, 설비에 대해 분히 공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 거기에 맞춰 관리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