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정담]'시각장애인에게 들려주는 영화…나도 몰래 눈시울 붉혀'

영화 '소풍' 화면 해설한 유인촌 문체부 장관
노인들의 애환, 중후한 목소리로 전해
배리어프리 공연·전시↑…시작은 배우 수어교육
1년간 500곳 누비며 하루 1만보
현장의 목소리에서 '현답' 찾아

"평생 현장에 있었다. 모든 답은 거기에 있더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문체부 장관으로 일할 때부터 줄곧 강조해왔다. 그만큼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다. '현장형' 장관이라 불릴 정도다. 실무진의 고충을 경청해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갈등과 대립이 반복되는 문제 앞에서 평형감각도 유지한다.

만보정담-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 CGV피카다리에서 열린 가치봄영화제에 참석, 영화 '소풍' 을 관람하고 출연배우, 초청 장애인 등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윤석열 정부에서 문체부 장관으로 임명된 건 지난해 10월. 만 1년 동안 현장을 방문한 횟수는 500회 이상이다. 하루 평균 일정을 세 개 이상 소화할 만큼 분주하게 움직인다. 수행비서들은 빡빡한 스케줄에 혀를 내두른다. "장관님 연세가 일흔셋인데, 저보다 체력이 훨씬 좋으신 것 같아요."

'현장형' 장관, 동력은 걷기

체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유 장관은 건강한 습관으로 유지한다. 밑바탕은 걷기다. 틈나는 대로 도보한다.

"일부러 걸음 수를 세면서 걷진 않지만 요즘에는 하루 1만 보 정도 움직이지 않나 싶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한두 정거장을 미리 내려서 걸어가고. 어느덧 도보가 운동이라기보다 생활이 됐다."

문체부 장관을 맡으면서 걸을 기회는 현저히 줄었다. 시도를 옮겨 다니며 현장을 찾을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주말 일정마저 빡빡해 일정한 경로를 정하고 걷기가 어려워졌다. 유 장관은 "현장에서 틈새 시간을 활용해 걷는다"고 했다. "아무리 일정이 많아도 이동 중에 몇십 보라도 걸을 여유가 생기면 가급적 도보로 간다."

유인촌. 사진=윤동주 기자 doso7@

걷기를 챙기는 이유는 단순히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생각할 일이 많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그는 "걷기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걷는 동안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랜 시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솔직한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곤 한다. 새로운 풍경과 문화도 경험할 수 있다. 매일 다니는 출근길이라도 걸어서 가면 자동차나 대중교통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을 마주한다. 잘못 접어든 길에서 뜻밖의 경관을 보기도 하고. 하나하나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배우다

유 장관은 지난달 4일 가치봄 영화제가 열린 서울 종로구 CGV 피카디리 1958을 찾았다. 자신이 화면을 해설한 특별상영작 '소풍'을 관람했다. 가치봄 영화제는 장애를 소재로 하거나 장애인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 약 서른 편을 상영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장애인 영화제다. '가치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영화를 '같이 본다'는 의미를 담은 영화 한글 자막 화면해설 서비스의 명칭이다.

'소풍'은 노인들의 애환을 다룬다. 파킨슨병에 걸려 툭하면 손목을 떠는 고은심(나문희). 사돈이자 친구인 진금순(김영옥)은 매일같이 밭일한 탓에 허리 병을 달고 산다. 모두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갖길 소망한다. 안타깝고 애절한 이야기는 유 장관의 중후한 목소리를 통해 객석에 전달됐다.

만보정담-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 CGV피카다리에서 열린 가치봄영화제에 참석, 영화 '소풍' 을 관람하고 출연배우, 초청 장애인 등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금순과 은심이 나무 막대기로 바닥을 짚으며 노란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산길을 올라간다. 금순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꾸준히 걷는다. 두 사람이 난간이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한 손으로는 난간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다. 두 사람은 거의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간다."

시각장애인 상당수는 눈물을 훔쳤다. 유 장관도 눈시울을 붉혔다. 한 달 전 작은 화면으로 보며 녹음까지 했는데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함께 자리한 출연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유 장관의 화면해설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문희는 "제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화면해설로 느낄 수 있어 따뜻하고 좋았다"고 말했다. 박근형도 "영화를 해설하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랐는데, 제가 놓치고 지나간 것들을 알게 해주더라"며 "영화의 느낌이 배로 전해지는 듯했다"고 밝혔다.

아쉬움을 토로하는 관객도 더러 있었다. 한 청각장애인은 "자막으로만 보니 감성 전달이 기대만큼 원활하지 않았다"며 "수어 통역 영상을 같이 첨부해주면 훨씬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시각장애인도 "화면해설 영화를 경험하는 영화관이 없다시피 하다"며 "이런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조언"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만보정담-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 CGV피카다리에서 열린 가치봄영화제에 참석, 영화 '소풍' 을 관람하고 출연배우, 초청 장애인 등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배우로서 무대에 섰을 때는 배리어프리 공연이나 영상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다. 지난 4월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스카팽'을 무장애 공연으로 관람하면서 깨달았다. 수어 통역사가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올라 그림자처럼 내용을 전달했는데, 수어와 표정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야말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들고 누리는 문화 예술 현장이었다.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알 권리' 보장은 물론 농인들의 자유로운 문화 향유와 창조를 위해 이런 환경을 넓혀보겠다."

수월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문화계에 배리어프리 전문인력이 부족한데다 추가되는 제작비도 만만치 않다. 유 장관은 국립예술단체와 국립문화예술시설을 중심으로 배리어프리 공연과 전시 문화를 퍼뜨릴 생각이다. 시작은 연극배우를 대상으로 한 수어 교육이다.

"수어 통역 연극의 경우 기존 대본을 수어로 번역하고 연습하고 실연까지 해야 하더라. 사실상 연극 전 과정에 버금가는 시간과 비용 부담이 불가피하다. 무대와 연기에 익숙한 배우들이 기본적인 수어를 배운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배리어프리 정착에 수반되는 갖가지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 무대를 넘어 다른 문화 현장까지 활용도도 높아질 수 있다."

현장에서 찾는 즐거움

나문희는 이날 관객들에게 건강한 삶을 영위하라면서 웃으라고 권했다. "지난해 영감이 가고 저 혼자 산다. 해가 저물어갈 때면 '어서 데려가 줬으면'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또 멀쩡해져서 '어제 왜 그랬지' 싶더라. 고독을 달래려고 어린 시절 친구와 자주 교류한다. 오후 8시가 되면 전화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함께 가곡을 부른다. 그렇게 신나게 노래하고서 '우리 오늘도 웃자'며 통화를 마친다. 살아보니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

만보정담-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종로 CGV피카다리에서 열린 가치봄영화제에 참석, 영화 '소풍' 을 관람하고 출연배우, 초청 장애인 등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유 장관은 당부대로 환하게 웃으며 영화관 밖까지 나문희를 배웅했다.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이다. 직책상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문제가 벌어져도 진정성을 갖추고 일한다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진 않지만 진정성의 힘을 믿는다. 설사 오해가 생기더라도 언젠가 상대가 이해할 날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든 힘을 주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세상 이치가 그렇다. 뭔가를 새롭게 추진하거나 좋게 바꾸려고 하면 기존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럴 때일수록 과연 옳은 게 무엇인지, 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한다. 그렇게 나온 결론이 그대로라면 오해받거나 욕을 먹어도 받아들이려고 한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긴장과 불안을 완화하는 그만의 방법은 하나 더 있다. 자전거 운전이다. 바람을 가르며 씽씽 내달릴 때마다 갑갑하던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배우로 활동한 지난해 상반기에 집에서 공연장까지 편도 30㎞를 매일 자전거를 타고 오갈 만큼 좋아한다. 유럽에서 2000㎞를 자전거로 횡단한 적도 있다.

문체부 장관을 맡으면서 안장에 엉덩이를 얹을 기회는 크게 줄었다. 지역 방문 때 직원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정도다. 엄밀히 따지면 이 또한 업무다. 자전거 관광 코스와 안내 체계를 점검하며 관련 사업을 구체화한다. 전적지 자전거 순례길이 대표적 예다. 한반도 구석구석에 있는 의미 깊은 격전지와 기념시설을 이야기로 묶어 관광상품으로 개발한다.

14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가 서울 종로구의 장관 후보 사무실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유 장관은 최근에도 자전거를 타고 서귀포 성산읍에 있는 '호국영웅 강승우로'와 '6·25 참전 기념비'를 비롯해 가평 안보 전적지, 양평 전적지 등을 찾았다. 그는 "한국전쟁 때 참전국들의 참전비와 국군이 전투에서 공을 세준 전적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순례길 코스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자전거를 좋아하는 분들이 전국을 다닐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껏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우리나라만큼 자전거길을 잘 만들어놓은 곳이 없더라. 지역관광을 활성화하기에 충분한 인프라다. 훌륭한 자원인 만큼 자전거 여행이 주는 매력과 지역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앞으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페달을 열심히 밟겠다."

걷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장관 때문에 문체부 전체는 '현장형'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산업과 학계, 행정기관 관계자들을 부지런히 만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유 장관의 특별 주문이 있었다. "현장주의자로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 끊임없이 얘기를 들었다. 현장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예술 현장의 목소리는 책상에서 정책을 짤 때와 엄청 다르다. 세종시에 있는 여러분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문화스포츠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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