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세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인류 최초로 현미경을 발명한 네덜란드 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벌레, 피 한 방울 속 혈구, 박테리아, 움직이는 정자, 우물물 한 방울 속 세균 등 무수한 생명체를 마주하고 그 경이와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맨눈으로 보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그는 현미경을 통해 또 다른 세계인 미생물학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냈다.
비단 현미경과 같은 도구가 아니더라도 지구 바깥 우주 너머의 세계, 아직 인간이 알지 못하는 소립자의 세계 또한 인류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강이경 작가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존재는 알고 있는 공간을 시각화하는 작업에 천착해온 인물이다. 그는 디지털과 실재 세계의 관계를 꾸준히 다뤄오며 현대미술의 장르 결합을 통해 자신의 예술가적 상상에 관한 질문을 관객에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공간'이란 주제로 제시한다.
오는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진행되는 ‘2024 금호영아티스트’전 2부에서 선보인 '우로보로스의 조각들(Altered Existences in Ouroboros)' 또한 자신의 발밑, 버려진 공간과 지하 세계의 암흑물질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신작으로 구성됐다.
강 작가는 자신을 '미지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2021년 미국 샌포드 지하 연구소(SURF)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지하세계의 암흑물질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아래 숨겨진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광산을 개조해 만든 샌포드 연구소는 깊이만 1.5km에 달하는 고심도 지하공간으로, 암흑 물질과 중성미자 등을 찾아내기 위해 물리학 실험을 하는 연구시설이다.
이곳에서 어느 날 운전을 하던 중 내비게이션에 오류가 나며 글리치 현상이 일어났고, 그 화면 속에서 순간 우주 공간을 봤다는 작가는 "그럼 내 발밑 세상은 어떨까?"라는 상상을 발휘했다고 한다. 평소 그가 관심을 두고 있던 지도학과 불교철학, 우주론에 대한 연구는 지하세계 연구와 접목돼 벽화 '웰컴 투 우로보로스 월드 Welcome to Ouroboros World'(2024)와 설치작업 '우로보로스 Ouroboros'(2024) 등의 작업까지 곧 창작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평면 작품 31점과 벽화 1점, 설치 작품 2점을 선보인다.
신화적 모티브와 종교적 도상을 통해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 동시에 이를 직시하고 치유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왕선정 작가의 작품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인식한 삶의 모습, 사건, 감정 등을 캔버스 화면 안에 극적인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강렬한 색채와 특유의 묘사력으로 악몽 속 풍경의 장면들을 그리며 자신의 감정과 조형적 미감을 자유로이 표출한 회화 작품 15점과 뜨개질 및 자수 작품 2점을 공개한다.
"언제인가부터 스스로 꿈속에서 나는 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매일 반복 되고 도망칠 수 없는 악몽을 꾸며 이렇게 생생하게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날아올라 버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처럼 아주 조금씩 땅에서 발을 띄웠다 떨어지길 반복하면서 이내 조금씩 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그러다 끝내 날아올라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온갖 괴물들이 나를 찾아 웅성이고 북적이는 걸 보며 나는 희열을 느낀다."
왕 작가는 작업 기간 중 기록한 작가 노트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내 이 순간을 직시하며 스스로 극복하는 법 또한 터득했음을 덧붙인다.
'당신을 위하여'(2023)에서 볼 수 있듯 그의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조류, 천사, 반인반수 등의 형상과 뒤틀린 몸을 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공포, 불안, 두려움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 날아오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작가의 회화는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 살아가며 마주하는 공포와 희열을 함께 함축하며 보는 이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감정과 정서를 자극한다.
출처가 다른 여러 종이를 모으고 으깨고 이어 성벽을 세운 임선구 작가의 작업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미묘한 관계 속에서 세상을 구축하는 인간 군상의 관계를 펼쳐놓은 듯하다. '축성법'이란 제목에서 드러나듯, 작가는 종이와 흑연을 기반으로 개인적 경험과 기억, 타자와 공동체의 이야기를 엮어 다양한 층위의 드라마를 만든다.
연약한 종이 위에 남긴 흔적과 도상들은 얽히고설켜 하나의 성을 완성한다. 최근 작가는 이러한 종이 드로잉을 구기거나 찢고 기워내는 것에서 나아가 덩어리가 되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성을 짓는 방법이라는 전시 주제에서 출발한 이번 작품은 출처가 다른 여러 종이를 모으고 으깨고 이어 성벽을 세운 작업의 결과물이다.
종이 파편을 이어 붙여 형성한 종이 벽면에 난 구멍 사이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깃든 드로잉 콜라주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바람 벽'(2024)과 함께 잘게 으깨고 뭉치기를 반복하며 제작한 17개의 종이 벽들이 서로를 지지하며 서 있는 '기대는 벽'(2024)은 가로 13m의 대형 설치 작업으로 전시 공간을 압도한다.
항상 밑바탕이 되었던 종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공간을 점유하는 거대한 종이 성벽들은 나와 우리의 언저리에 존재하는 세상의 수많은 장면을 투영하며 관객을 향해 삶에 대한 반추의 질문을 던진다.
금호미술관이 20년째 운영하는 금호영아티스트 프로그램은 2004년 1회 공모를 시작으로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젊은 시선에 주목한 신진작가 발굴의 장으로 미술계 흐름의 한 축을 형성했다. 총 21회 공모를 통해 95명의 작가를 선정, 신진작가 개인전 개최를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