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주기자
#기재부 #코인 #가난 #엘리트 #호남
모두 김용범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공직에 있던 그가 이젠 블록체인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 대표를 볼 때마다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김환기와 김종학 그림을 좋아하고, 황병기 가야금 산조를 즐겨듣는 경제 관료가 과연 서민의 삶을 이해할까?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그는 이런 시선이 담긴 질문에 말간 눈으로 "제 고향이 전라남도 무안군 시골이에요. 저야말로 가난을 잘 알죠"라고 말했다. 정통 관료, 독립경제학자 등 수 많은 수식어는 그를 나타내기엔 너무 좁다. 경계 위에 선 인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아시아경제는 그와 함께 걸으며 한국경제, 블록체인, 양극화 주제부터 개인사까지 경계를 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장소인 수성동 계곡은 그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다. 금융위에서 근무할 당시 머리가 복잡할 때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혼자 수성동 계곡을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정부서울청사가 보인다. 김 대표는 "여기서 보면 청사 건물이 작죠? 안에 있을 때는 무겁고 크게 느껴지던 일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다시 보곤 했어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감탄을 하자 그가 돌아보며 "저만의 비밀 장소에요"라고 웃는다.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수묵화가 눈 앞에 펼쳐진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 시대에도 안평대군을 비롯해 문인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 세월이 흘러 삼군부(예조) 자리에는 정부서울청사가 들어섰고, 왕이 머물던 경복궁 뒤편에는 청와대가 앉았다.
이제는 '대표이사'로 불리지만, 여전히 그를 '차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기재부 제1차관, 금융위 부위원장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를 제외하고 기재부와 금융위 정무직을 모두 경험한 관료는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 등 몇 안 된다.
그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는 '호남'이다. 그의 고향은 무안군 해제면이다. 남도의 섬들 사이에서 간신히 육지를 붙잡고 있는 지역이다. 정치적 선명성을 추구하는 지금의 정치 지형에서 '호남'이란 단어는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관료 김용범을 가두는 것도, 그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김 대표는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고3 수험 생활을 했다.
-대학 친구들은 학생운동을 했을 텐데 고시 공부를 했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궁금하다.
<i>"고등학교 때 광주로 올라왔어요. 고3 때 5.18을 겪었어요. 나는 대학에서도 공부했지요. 그때의 부채 의식이 있어요. 임관 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i>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행정고시 30회에 합격해 임관했다. 11년이 지나고 재정경제부 서기관 시절 IMF를 겪었다. "당시 재경부 분위기는 흉흉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카드 사태, 유럽 경제위기, 코로나19 등 모든 경제 위기를 경험했다. 이런 배경 때문일까. 김 대표는 정부의 재정 역할을 강조하는 몇 안 되는 경제 관료 중 하나다.
김 대표는 임관 후 재경부 금융정책과 세계은행 선임 이코노미스트, 재경부 은행제도 과장, 금융위 금융정책국장, 금융위 부위원장, 기재부 제1차관까지 역임했다. 그는 세계은행 파견 당시 유창한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 관료로 유명했다. 관례를 깨고 세계은행이 그를 위해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보직을 새로 만들어주자 당시 김석동 차관보가 "은행과장으로 인사 낼 테니 들어와"라고 직접 전화했던 일화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이제 블록체인 업계의 리딩 그룹인 해시드 산하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 대표는 2017년 금융위 부위원장 재임 당시 실명계좌만 코인 거래를 허용하는 '가상자산 거래 투명화' 정책을 발표했다. 비트코인 최고 가격이 1만9600달러까지 치솟았던 버블 시기였다. 원래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를 주도한 법무부는 가상자산 거래소 폐쇄를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위가 가상자산 거래를 유지하되 실명 확인 계좌를 만들어 관리하자고 제안하면서 방향이 틀어졌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도 정통 관료가 블록체인 업계로 이동한 것은 눈길을 끄는 행보다.
- 왜 블록체인 업계로 옮겼나요? 의외의 행보입니다.
<i>"금융위에 있을 때 코인 버블이 심했어요. 당시에는 코인에 대한 정보나 관련 지식이 별로 없었어요. 그때 경험해본 적 없는 곳에서 불을 진화하는 두려움을 느꼈어요. 금융과 블록체인이 만났을 때 버블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봤으니까요. 버블 충격이 몇 번이고 다시 올 수 있다고 봐요. 기재부에 가서 팬데믹과 싸우느라 블록체인에 대해 신경 쓸 정신이 없었지만, 블록체인 이후 세상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했습니다."</i>
김 대표는 블록체인에 대해 '변혁적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현재의 질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라는 의미다 인공지능(AI)과 함께 블록체인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비트코인이 대표적이다.
그는 "라이트닝 네트워크 등 응용 기술이 등장해 비트코인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고 오디널스 같은 소유자 새김 기능도 추가되면서 비트코인이 디지털 음원, 부동산, 채권, 예금 거래에서 지불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비트코인이 실생활에서 활용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비트코인이 전자 지급 수단으로 등장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결제 기능보다 새로운 가치 저장 수단인 '디지털 금'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같이 기술적 유용성이 검증되고 투자 자산으로 안착한 대표 종목을 사서 보유하는 것은 안전하다"고 했다.
최근 비트코인 시세는 거침없다. 매수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투자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김 대표는 무분별하게 추격 매수해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단기 수익보다는 새로운 기술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장기 투자해야 한다"고 재차 설명했다. 그가 속한 해시드는 블록체인 장기투자 기업으로 유명하다.
김 대표는 블록체인과 관련해 일본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수적인 일본 당국이 적극적으로 블록체인 규제를 완화하고 있어서다. 블록체인 산업 육성을 통해 제조업, IT 산업 등 글로벌 경쟁력에서 밀리는 일본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일환으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IVS 크립토 교토와 웹엑스(WebX Japan) 등의 행사에 참석했다. 선진국 중 블록체인 행사에 정부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서는 것은 이례적이라 주목을 받았다. 김 대표는 "일본은 웹3.0 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톱다운 방식으로 총리가 직접 참석하고, 업계 네트워킹 파티에도 정부 관계자가 온다"며 "일본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이 대목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을 중요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해시드오픈리서치로 옮긴 그는 독립경제학자로서 본인의 이름을 다시 쓰고 있다. 그에게 한국경제의 현주소를 묻자 "2024~2025년은 고금리 충격이 본격화되는 시기"라고 답했다.
2020~2021년은 전 세계가 팬데믹과의 전쟁을 치르며 각국의 정부가 재정 확장 정책을 펼쳤다. 2022~2023년은 '인플레이션(고금리)과의 전쟁'으로 요약된다. 미국이 금리를 급격히 인상했다. 영국 파운드 폭락 사태,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의 이슈가 있었지만 잘 넘어갔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i>"금리 인상 후 약 12~18개월 뒤에 충격이 옵니다. 2022년 금리 인상이 시작됐으니, 올해부터 고금리에 따른 파산 등의 영향이 올 거예요. 은행, 증권사, 저축은행 등 금융사의 이익이 줄고 충당금이 늘었습니다. 자산 가격이 올랐는데 왜 그럴까요? 2022년 이전에는 이지머니였습니다. 특징은 저금리, 저물가, 저임금, 풍부한 유동성, 자산 가격 상승으로 요약됩니다. 지금은 고금리, 고물가, 고임금으로 시스템이 다릅니다. 리파이낸싱해도 최소 6~7% 수준이에요. 이제 과다 차입 주체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i>
다만 그는 "시스템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부가 고위험 영역에 대해 밀착해서 잘 관리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거시경제 안정에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일본은 미국과 동조하는 국가로 분류되고, 한국은 중국과 동조하는 국가로 평가받는다"라며 "그런 측면에서도 독자적인 거시경제 안정을 갖춘 여력이 있다는 걸 대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경제 상황을 볼 때 사정이 가장 어려운 국가로 '중국'을 꼽았다. 김 대표는 "중국 경제의 특징이 과다 레버리지"라며 "팬데믹 이후 가장 타격이 큰 국가 중 하나가 중국"이라고 말했다. 중국 경제는 부동산 의존도가 높고, 헝다우 사태와 관련해 정책 자충수도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미국에 견제당하는 가운데 고령화도 본격화되고 있다"며 "중국 성장률 6%~7% 시기는 지났고, 앞으로 3~4% 내외 장기 저성장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i>"빈부격차는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질병이다."</i>
<i>-플루타르코스</i>
김 대표의 최근 관심사는 '양극화'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격변과 균형'에서 한 장(章)에 걸쳐 '양극화 해소'에 대한 내용을 다룬 바 있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역군들의 노후 △고용안전망 사각지대 △자산 격차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반도체, 배터리 등 글로벌 경쟁 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기업 정규직이에요. 중소기업 근로자와 격차가 큽니다. 반대로 한국은 명품시장 규모가 세계 3~4위에 달해요. 저는 우리나라의 구조 자체가 망가졌다고 보지 않아요. 다만 계층, 세대, 지역 간 명암이 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라가 작은데 그 안에서 격차가 크니 사회갈등도 큰 거죠. 지금은 사다리도 고착되었어요. 특정 계층은 자산이 너무 쌓이고, 반대의 경우는 서울에서 밀려 나가고 있어요."</i>
김 대표는 양극화와 함께 '국민연금 개혁'도 시급한 문제로 꼽았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i>"국민연금은 정부가 운영하는 공적연금 제도이므로, 공동체의 합의가 중요합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후세대의 부담은 커지기 때문에 국민연금 제도에 대한 갈등이 커지고 있어요. 공적연금은 기본적으로 사회 통합(합의)의 산물이에요. 이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필요합니다."</i>
그는 국민연금뿐만 아니라 의(醫)-정(政) 갈등 역시 이면에는 국민건강보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공동체 합의가 필요한 큰 담론은 정부와 시민단체, 학계 등 국가 거버넌스 차원에서 치열하게 공론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공직이 그립지 않냐'고 물었다. 김 대표는 "할 만큼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대담=이선애 증권자본시장부장
정리=황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