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채석기자
"미국 전문직 비자(H-1B)의 유효기간(6년)이 만료된 직원들이 미국 업체로 이직하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오히려 H-1B 비자가 미국기업으로 취직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부와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유관단체들이 미국 정부에 한국인용 H-1B 비자 쿼터를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인재유출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이차전지 등 첨단기업들의 미국 투자 확대로 협력사들 역시 현지에서 추진해야 할 업무가 많아지고 있는데, H-1B 비자를 확대 적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국내인력의 해외 이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29일 만난 국내 중견 반도체 소재업체 고위 임원은 미국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비자문제로 고심이 깊다. 현재 이 회사에서 H-1B를 발급받은 직원은 모두 10명. 비자가 만료되면 미국 업체로 이직을 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임원은 "미국 대학 등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H-1B 비자를 받은 전문직은 비자 기한이 끝나면 회사에 남을 확률이 높지 않다"면서 "인재들이 미국 업체로 이직해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막을 순 없기 때문에 '도망'을 가도 사실상 고용주 입장에서는 답이 없다"고 했다.
이런 걱정도 무리는 아니다. H-1B 비자 만료가 다가온 이 업체 일부 직원들이 미국 현지에서 SK하이닉스를 거쳐 미국 기업으로 이동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최근 들어 첨단 제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유리기판이 주목받고 있는데, 이를 다룰 수 있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연스럽게 한국 반도체 인재가 포섭 대상이 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효율을 높이기 위해 플라스틱 기판을 유리 기판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미국 현지에 체류하는 인재 수요가 늘어난다는 의미"라고 했다.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H-1B 비자를 확대해도 GM이나 포드 같은 미국기업으로 이동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H-1B 비자 발급을 회계·금융 등 비이공계 전문직이 원하고 있는 점도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첨단공장의 기술지원이 비자 확대의 주요 목적인데, 인문계 수요가 많으면 인력의 미스매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내 한국 법인이 현지 한국인을 고용하면 이공계보다 문과계통 지원이 몰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H-1B 확대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업체 입장에선 인재를 붙잡아두기 위해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공, 정주 여건 개선 등 복지를 늘릴 수밖에 없는데, 부담이 만만치 않다.
업계 관계자는 "필수 인재는 실리콘밸리 내 디자인하우스, 팹리스(설계전문 회사) 등보다 2배 이상 연봉을 줄 각오를 해야 하고, 핵심 연구개발(R&D) 인재는 국내 체류를 권장하는 게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H-1B 비자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면서도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을 위해서라도 비자 요구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이어 "미국 첨단 기업이 현장에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 인력을 갖추는 데 한국인 H-1B 비자 할당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해 비자 할당량을 확보한 뒤 인력 유출 방지책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