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기자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검진 항목에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 나이 측정 검사를 포함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20일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이인실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원장은 저출산 문제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화끈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합계출산율 0.78명 시대에 조금씩 업그레이드했을지언정 여전히 과거를 답습한 저출산 정책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개인의 난자·정자 나이 측정을 정부가 비용 들여 해줘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 원장은 "결혼 시점이 늦어지면서 가임기 출산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기간 자체가 과거에 비해 짧아졌다. 원치 않게 시기를 놓치면서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며 “개인이 출산을 충분히 고민하고 계획을 짤 수 있게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는 고민에서 비롯된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자신의 상황 파악을 통해 난자 동결 등으로 임신 시기를 확장하는 선택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난자 동결은 난소가 노화하기 전에 난자를 추출해 얼리고 원할 때 이를 해동한 뒤 체외수정 시술을 통해 임신을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차병원그룹이 산하 5개 난임센터에서 취합한 미혼 여성의 난자 동결 보관 시술 건수는 2015년 72건에 불과했으나 2021년 1000건을 넘겼고 매년 늘어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출산율 제고를 위한 방안으로 난자동결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서울시는 기존 30~40대 여성에게만 지원해주던 난자 동결을 20대 여성도 최대 200만원까지 지원해주기로 했다.
이 원장은 "우리 정부도 이제는 프랑스처럼 자녀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 한 달에 100만원씩 아동수당을 주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남성 육아휴직 확대, 여성 경력단절 예방, 유연근무 활성화 등 제도를 개선해서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문화로 바꿔 나가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최근 화제가 된 부영그룹의 출산지원금 1억원 지급 결정에 대해서는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점, 이로 인해 정부가 지원책 관련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기업이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인 만큼 개인과 기업 모두에 인센티브가 될 수 있는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일회성 지원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가족친화기업은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해 인적자본 투자세액공제를 통한 세금 감면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학자인 이 원장은 여성 최초로 통계청장과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냈다. 2022년 한미연 출범부터 초대 원장을 맡았다. 저출산 관련 연구와 세미나 등을 통해 극복 방안을 찾는 데 힘쓰고 있다.
이 원장은 성별 임금 격차와 이중적 노동시장 구조를 출산율 하락의 주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한국 여성인력은 2013년에 이미 남성보다 대학 진학률이 더 높을 정도로 수준이 올라왔다”면서 “20대와 30대 여성들의 고용률도 높은 편”고 말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여성의 소득 수준도 낮아졌다는 설명이다.
이 원장은 “육아 문제로 일을 그만둔 뒤 두 번째 직장을 구하려면 아이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용보다는 더 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대부분 여성의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대체로 M자 커브가 거의 없어졌다”면서 “우리만 아주 명확하게 뒤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성평등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만 15세 이상 65세 미만 인구의 경제활동 참가율 성별 격차는 2021년 기준 18.1%포인트로 OECD 평균인 10.9%포인트보다 7.2%포인트 높았다. 한국은 성별 간 격차가 큰 하위 8개국에 포함됐다.
이 원장은 이중구조 노동시장도 문제라고 봤다. 이중구조란 노동시장 내 임금과 근로조건 격차가 고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육아 등을 사유로 퇴사한 여성이 비정규직, 파트타임으로 근로를 하게 되면 정규직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던 여성이라 하더라도 다시 원래 근로 시장으로 진입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에 따른 이같은 복합적인 상황은 결국 저출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원장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정규직으로 옮겨 갈 확률이 너무 낮다”면서 “미국이 일·가정 양립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잘 사는 이유 중 하나는 좋은 대학을 못 갔거나 첫 직장에 관계없이 자기가 열심히만 하면 새로운 직장이나 직업으로 가는 데 큰 무리가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1차 노동시장(대기업 정규직, 공무원)에 들어가면 살아남고 2차 노동시장으로 한 번 빠지면 1차로 가기가 너무 힘든 구조”라고 했다. 그는 “이중시장 노동문제는 청년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고도 덧붙였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 집중화에 따라 시의적절한 정책 결정이 뒤따르지 못한 한계도 지적했다. 이 원장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클라우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 120년간의 상황을 분석한 여성 집단 분류 체계를 예로 들며 “우리나라는 집단 1~5 여성이 한 세대에 다 같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골딘 교수는 미국 사회 대졸 여성이 시대별로 커리어와 가정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달랐다고 분석했다. 1880년대 커리어와 가정,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주를 이뤘다면(집단 1), 시대가 변하면서 1960년대 태어난 여성(집단 5)들은 커리어를 중시하면서도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해외 국가들이 산업화를 진전시켜 나가면서도 그때그때 바뀐 집단에 맞게 제도를 고쳐나갈 기회가 있었던 것과 달리, 한국은 100년에 걸친 성장과 이에 따른 갈등이 압축돼 있어 정책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이 원장은 “지금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개인이 개별적인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라면서 “이제는 제도적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공존할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의사 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구세대들이지만, 그 사람들에게 청년들의 삶을 기준에 놓고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제5조)을 보면 출산을 국민의 책무라고 명시했다”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인간이 가지는 행복인데, 권리로 보전을 해야지 어떻게 책임을 다하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법 개념을 가진 나라가 어떻게 일·가정 양립을 하겠느냐”고 했다.
이 원장은 남성 육아휴직을 장려하기 위해서 기업은 눈치 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고, 정부는 재원이 부족한 중견·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을 위한 제도를 촘촘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북유럽 국가들처럼 아빠 육아휴직을 기간 내에 안 쓰면 없어지게 하는 등 제도를 도입해야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부모가 같이 경험해야 같이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저출생 특별회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적 어젠다가 있을 때마다 특별회계를 만들어서 관리했다”며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제 저출산 문제는 특별회계를 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수십조원을 썼다고 하는데 따져보면 가족 지출 예산은 크게 늘지 않았다”며 “확실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곳부터 재정 지출을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고용보험 기금도 언젠가는 고갈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회계를 만들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육아휴직 복귀 후에도 업무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 경력단절을 예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원장은 “육아휴직을 쓰고 난 뒤 승진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면서 “파트타임이나 재택근무로도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오래 근로한다고 해서 일을 다 잘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오랜 시간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성도를 따지면 안 된다. 그로 인한 차별을 줄여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저출산 관련 정책을 파격적으로 시행할 때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정말 마음먹었나 보다’, ‘아이가 클 때까지 확실히 지원해주네’ 이런 생각을 청년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상징적으로 100만원을 만 18세까지 준다고 해보라”고 제언했다. 그는 자녀 1인당 약 2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하며 재원 마련은 “지방재정교육교부금을 통하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1960년대 자본 축적을 위해 정부가 물적 자본 투자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한 것처럼 저출산 대응에 나서는 가족친화기업에 일종의 인적 자본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부의 지원이 더 확실해진다면 기업들도 출산율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일·가정 양립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