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이기자
"한국이 근로 시간의 성별 격차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수준으로 축소하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8% 증가할 것이다."
지난해 12월 세계여성이사협회 특별포럼 참석차 방한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연설 내내 강조한 말이다. 그는 "일하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18% 적고 임금은 남성보다 31% 적게 받는다"며 "더 많은 여성을 일하게 하는 것이 국가의 소득을 올리고 기업을 강하게 만들어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과거보다 올랐으나 남녀 임금 등 실질적인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직접적인 지원과 함께 유연한 노동시장, 관습 개선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의 통계들은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25일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4.6%로, 10년 사이 4.5%포인트가 늘었다. 특히 지난해 전체 신규 취업자는 전년 대비 32만7000명이 증가했는데 이 중 남성은 2만4000명이 늘어난 데 비해 여성은 30만3000명이 늘었다. 이 기간 취업한 10명 중 9명(92.6%)이 여성 몫이었다. 통계청 관계자는 "지난해 50~60대 여성이 근무하는 아이돌봄 서비스 수요 등이 늘어난 영향"이라며 "남성은 이미 취업자가 많기 때문에 여성의 증가분이 더 큰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여성 비율은 급격히 줄어든다. 2021년 여성가족부가 상장법인 2246개의 성별 임원 현황을 조사한 결과 여성 임원 비율은 5.2%에 불과했다. 2022년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경제가 매출액 상위 100대 상장사를 기준으로 분석한 ‘양성평등 종합점수’ 데이터에서도 여성 사내·외 이사 비중은 미미했다. 회사 정책 결정권을 가진 사내이사는 전체 대상 법인 중 5곳에 지나지 않았다.
2020년 2월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은 이사회 이사 전원을 특정 성별로 구성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여성 임원 수는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여성 임원은 사외이사라는 한계를 지닌다. 게다가 구체적인 제재 조항이 없어 대상 기업 중 아직까지 여성 이사를 선임하지 않은 기업도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수와 고위직 여성 수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성별에 따른 제약이 있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실제 한국은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집계한 ‘성 격차 지수’에서 146개국 중 105위로 하위권을 차지했다. 측정 지표에는 유사 업무 기준 남녀 임금 차, 남성 대비 여성 장·차관 비율 등이 포함돼 있다. 경제활동 참여율을 보여주는 성평등 지표(성 불평등 지수(Gll)·2021년 191개국 중 15위)에서 상위권인 한국이 성 격차지수에서 하위권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 ‘실질적 평등’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간극은 결혼과 출산에 따른 경력단절을 주로 여성이 겪기 때문에 발생한다. 지난해 6월 여성가족부가 만 25~54세 여성 85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은 10명 중 4명(42.6%)으로 파악됐다. 특히 모든 세대에서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이 자녀가 없는 기혼 여성보다 경력단절 경험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력단절 평균 발생 연령은 29세, 경력단절 기간은 8.9년이다.
이는 고용률 격차에도 영향을 미친다. 2022년 고용률의 성별 격차는 30~34세 구간에서 18.5%포인트, 35~39세 구간에서 30.7%포인트로 급격히 증가하는 ‘M 커브’ 곡선을 보인다. 10년 전 35~39세 구간의 격차(37.3%포인트)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출산할 시기에 경력단절이 일어나고 있음을 방증한다.
아시아경제가 ‘K인구전략-양성평등이 답이다’ 기획 취재 과정 중 만난 실제 워킹맘들의 사례를 봐도 출산 후 육아를 위해 퇴사를 선택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핀다 직원 김수지씨(36·여)도 "(전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기 힘들어서 그만뒀다"며 "재택이 없었으면 아이가 있으니 근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고 말했다.(관련기사: ) 송명진 코니바이에린 브랜드그룹 리드(41·여)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퇴사를 고민했다"며 "협업이 한창인 오후 시간에 중간중간 자리를 비워야 해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고 털어놨다.(관련기사: )
여성의 업무적 성장을 방해하는 또 다른 요인은 임금 격차다. 여성가족부와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3년 여성경제활동백서’에 따르면 2022년 전체 여성 근로자의 평균 월임금 총액은 268만3000원으로, 412만7000원인 남성의 65% 수준이다. 정규 근로자의 평균 임금 수준으로 살펴봐도 여성이 320만3000원, 남성이 463만3000원으로 143만원 정도 차이가 난다.
여성 임금이 더 낮은 현실은 또다시 여성 경력 단절로 이어진다. 일을 관두고 아이를 기르는 역할을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여성이 맡게 되기 때문이다. 둘 중 한 명이 육아를 하고 한 명이 일을 해야 한다면 임금이 더 높은 쪽이 일하는 편이 가장 효율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육아휴직 후 복귀 시 겪는 불이익도 대다수가 여성의 몫이 된다.
경력단절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더 빈번히 일어난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제출받은 ‘기업 규모별 육아휴직 고용 유지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 중소기업(300인 미만) 육아휴직 종료자의 1년 내 고용유지율은 71.1% 정도였다. 반면 같은 기간 300인 이상 대기업은 3만3472명 중 2만9449명이 1년 이상 고용보험을 유지해 88.0%를 기록했다. 중소기업의 1년 이상 고용유지율은 대기업 대비 17%포인트 낮았다.
출산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이 남성보다 고용 환경이 불안정하다는 점도 여성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다. 지난해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성·근로형태별 임금근로자 규모 및 비중’ 집계에 따르면 전체 임금근로자에서 남자 정규직은 70.2%, 비정규직은 29.8%이지만 여자 정규직은 54.5%, 비정규직은 45.5%였다. 여성 비정규직에선 한시적 일자리와 시간제 일자리가 큰 규모를 차지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20~30대 여성의 고용·출산 보장을 위한 정책방향’ 보고서는 "20~30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과거에 비해 증가하고 있지만 여성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크다"며 "또 공공부문, 대기업에 진입한 여성을 제외하고 자녀가 어릴수록, 자녀 수가 많을수록 고용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우리나라도 중장기적 관점을 위해 성차별적 노동시장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방식, 수단을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남녀 임금 격차를 좁히지 않고는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출산을 할 경우 여성들이 돌봄 책임을 떠맡으면서 직장을 그만두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출산율도 늘지 않고 임금 격차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라며 "임금 격차가 큰 기업에 불이익을 준다거나 임금 격차를 해소하려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 실효성 있는 정책이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저출산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고 이를 개선해나가야 하는데, 현재 지원책은 표면적인 성격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다.
유연근무제, 남성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가 기업 근로자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일용직 근로자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기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정부 지원 제도가 대부분 고용보험에 가입된 근로자 위주로 설계돼 있다"며 "이를 벗어나는 정책 대상들도 포괄할 수 있는 형태로 제도가 운영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여성이 마음껏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익숙한 기업 분위기부터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목소리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채용·승진 과정에서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만들어놓은 구조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다"며 "승진을 시킬 때 명확한 근거를 기록하도록 하는 등 차별을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전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는 분기마다 성별, 인종, 민족별 관리직 비율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며 "기업이 다양성을 충족하는 데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기존 남성·시니어 중심 관리자의 위계적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며 "여성을 고위직에 앉히는 것은 단순히 성평등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고를 가진 사람을 섞어 놓음으로써 유연한 사고를 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