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포함 24만명 사망…日 원폭 최선이었나' 80년 이어진 논쟁

약 24만 사망자 낳은 일본 열도 원폭
학계 주류 의견은 "필요했다" 압도적
"상륙작전이 원폭보다 피해 더 컸을 것"
다만 2차 나가사키 원폭 두곤 반론도

8월 15일은 한반도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광복절이다. 그로부터 불과 9일 전인 1945년 8월 6일, 일본 열도는 미국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로 불바다가 됐다.

두 발의 원폭은 각각 16만, 8만명의 사망자를 낳았으며, 이 가운데 약 3만명은 조선인 피해자로 추측된다. 원폭은 한국의 광복,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인 동시에, 언제나 "과연 이렇게 해결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돼 온 사건이다.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피어 오르는 버섯구름. [이미지출처=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16만명 죽인 히로시마 원폭, 주류 의견은 "필요한 결정이었다"

'원폭 논쟁'은 78년째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 당시 일제에 대한 원폭 작전을 수행한 미국에서는 그동안 이 결정과 관련해 상당한 연구 자료가 축적됐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에 대해서는 학계도 대중도 "필요했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그 근거는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일제 및 연합군의 사상자 수 총합이 원폭 사상자를 월등히 능가한다는 데 있다.

1945년 당시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지 않을 거라고 봤다. 또 일제의 군사작전을 결정하는 '대본영' 또한 이미 '본토 결전' 준비에 착수했다. 이 작전은 일본 열도에 상륙할 연합군에 대항해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징발해 방어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따라서, 만약 연합군이 원폭 없이 일본에 상륙해야만 했다면 원폭 피해에 상응하는 고폭탄 폭격을 민간 지역에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원자폭탄 [사진=아시아경제DB]

이 폭격은 일본에 대한 전방위 해상 봉쇄와 함께 길고 천천히 수행됐을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일본 민간인이 겪어야 할 고통은 더욱 배가됐을 게 뻔하다. 작전 중 희생당할 미군, 영국군 등 연합군의 숫자도 수십만명으로 추산됐다.

대신 원폭은 미국의 의지를 대본영 눈앞에 보여주는 효과를 발휘했으며, 일본 지도부의 항전 의지를 꺾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무력 행사를 통해 종전을 앞당기고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2차 원폭 정당했을까…일각서 비판 목소리

문제는 히로시마 원폭 이후 3일 뒤에 수행된 2차 원폭, 나가사키다. 나가사키 폭격은 히로시마 이후로도 대본영 측이 구체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자 수행된 작전이었다.

왜 히로시마 이후 대본영이 빠른 결단을 내리지 않았는지, 또 미국 측은 왜 일본을 더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폭탄을 떨어뜨렸는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미국 수정주의 학계에선 두 번째 원폭이 지나치게 잔학한 결정이었다며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일본계 미국인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의 저서 '종전의 설계자들(2019)'에서 구체화됐다.

쓰요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원폭' 덕분이 아닌 '소련의 개입'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나가사키 원폭이 투하된 1945년 8월 9일 소련은 갑작스럽게 일본령 만주를 침공하며 남하했다.

'소련의 중립'은 당시 일제 대본영이 연합군에 대한 결사 항전을 각오할 수 있었던 주 이유였다. 하지만 미국, 영국에 이어 소련까지 일본을 향해 포위망을 조여오자 대본영은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거에 따라 쓰요시는 소련 침공이 일본 지도부에 불러올 어떤 영향도 평가하지 않은 채 곧바로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당시 결정을 비판한다.

세상 송두리째 바꾼 원자폭탄

원폭 투하 이후 잔해만 남은 건축물. [이미지출처=미 국립 아카이브]

나가사키 폭격을 진행한 미국의 진의, 일제 지도부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 진짜 배경 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나, 원자폭탄이 이후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것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세상은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서 진영으로 양분돼 '냉전'을 펼쳤다. 전 세계로 핵무기를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열강들이 나타났고, 상호확증파괴라는 전략이 탄생했다. 두 세계열강 사이에 직접적인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군비 경쟁은 훨씬 치열해졌고, 다른 약소국들이 열강의 대리전에 휘말리기도 했다.

핵무기는 21세기 현재도 국제 정치와 군사 전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례로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주변국에 전술 핵병기를 과시하며 다른 세력의 개입을 조기 차단했다.

이슈2팀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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