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표기자
'설'은 고향에 있는 가족의 얼굴을 모처럼 확인하는 때다. 동시에 설은 '트렌드'를 확인하기데 유용한 시기이기도 하다. 5000만 인구집단이 '설', '명절'이라는 키워드에 반응해 가시화된 행동패턴을 나타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은 거리두기가 해제된 이후 맞이하는 첫번째 설이었다. 설 연휴에 나타난 사회적·경제적 패턴을 살펴봤다.
부산이 고향인 직장인 A씨(43)의 가족은 이번 설 연휴를 태국의 유명 휴양지에서 보냈다. 올해 연휴는 기간이 짧아, 서울-부산 왕복 자가용 이동이 부담이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가족 해외여행도 못 갔던 터였다.
짧은 연휴였지만 공항은 발 디딜틈 없이 붐볐다. 앞서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난 20일(금)부터 24일(화)까지 5일 간 61만6074명, 일평균 12만 3215명의 여행객이 인천공항을 이용할 것으로 예측했다. 지난해 설 연휴(1월 28일~2월 2일·6일간) 대비 129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주요 여행사가 내놓은 통계를 보면 설 연휴 기간 해외여행 상품 예약률은 말그대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나투어는 20∼24일 출발하는 해외 패키지여행객이 1만5000여명으로 지난해보다 7015% 늘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모두투어는 설 연휴 해외 패키지 예약객이 전년 대비 9181% 늘었다.
반대로 설 연휴를 나홀로 보낸 '홈설족'도 눈에 띄었다. 설 연휴에 고향에 가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알바를 하는 등 사적인 명절을 보내는 이들을 뜻한다.
경북 울진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B씨(36)는 설 연휴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연휴 야간근무를 두 차례나 자원했다. 그는 "가족·친척들의 잔소리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던 데다, 당장에 한두푼이 아쉬운 상황이라 차라리 일이나 하면서 연휴를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는 이들도 있다. 취업준비생 C씨(27)는 "취업을 못한 상태라 가족·친척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알바나 하면서 학원비·생활비를 버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렇게 연휴를 보냈다"고 말했다.
고물가 행진이 계속되면서 차례상의 풍경이 바뀌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다양한 음식, 진수성찬은 사치로 취급된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조차 검소한 차례상을 거듭 권고했다.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물가 상승률은 8개월 연속 5% 이상을 기록했다. 장바구니 물가는 직격탄을 맞았다. 음식 가짓수는 줄이고, 시간과 노동,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밀키트 등이 대체재로 각광받았다.
인크루트가 설 연휴를 앞두고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6.7%는 "이번 설에 차례상을 간소화할 것"이라고 답했다. '고물가에 재료비 부담'을 이유로 든 응답자가 44%로 집계됐다. 차례상을 간소화한다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간편식이나 밀키트를 활용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고물가는 명절선물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설에는 명절선물 중고거래가 어느때 보다 활발했다.
24일 기준 당근마켓·번개장터·중고나라 등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스팸, 참치캔, 생활용품, 홍삼 절편, 홍삼환, 홍삼음료 등 명절선물을 판매한다는 게시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마시는 콜라겐, 비타민, 유산균 등도 다수 등록돼 있다. 대부분이 인터넷 최저가 대비 평균 20~50% 정도 저렴한 가격이다.
명절선물 중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명절테크'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명절'과 '재테크'를 합친 것으로, 명절선물을 되팔이하며 용돈벌이를 한다는 의미다. 직장인 D씨(34)는 "회사에서 스팸세트를 받았는데, 원래 스팸을 잘 먹지 않는 데다 지난해 추석에 받은 같은 제품도 그대로 있어서 포장째 팔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물가 상황에서 구매자는 비교적 저렴하게 선물 세트를 구매할 수 있어 생활비 부담이 줄어들고, 판매자는 불필요한 재고를 팔아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명절테크' 시장은 명절 때마다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허리띠를 졸라맨 사람도 있지만 '프리미엄'에 대한 선호도 여전히 나타났다.
위메프가 '2023 설프라이즈' 기획전 판매 데이터(1~13일)를 분석한 결과, 10만원 이상 프리미엄 선물 세트 구매도 지난해 설 기획전 대비 판매량이 29%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백화점들은 설에 맞춰 고급 한우세트와 프리미엄 와인 등을, 편의점 업계는 이색 선물로 다이아몬드와 골드바를 출시했는데 모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엔데믹 후 첫 대면 명절인 만큼,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도 증가한 점이 고가 선물 구매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고물가·고금리·고환율 '3고' 악재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증권·금융·부동산·가상화폐 등 자산시장의 동반하락과 전방위적으로 들려오는 위기의 경고음은 소비심리를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명절용품 중고거래 활성화, 차례상 비용절감, 명절테크 등은 3고에 따른 위기감을 피부로 느낀 소비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렌드분석가 김용섭은 '라이프트렌드2023'에서 올해의 트렌드 키워드로 '과시적 비소비'를 꼽았다. 소비가 아닌 비(非)소비를 과시한다는 뜻이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자산 가치 하락 등으로 '욜로'(YOLO·인생은 한 번뿐)를 실천할 자금이 부족해진 사람들이 비소비를 대안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명품 소비 열풍이 잦아들고, 중고시장이 크게 성장하는 것도 불필요한 지출을 끊으려는 소비자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생활 꿀팁', '절약 노하우'를 공유하는 일도 주류문화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평균의 실종'도 이번 설 연휴에 확인된 키워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2023년 소비 트렌드 키워드 중 첫번째로 제시한 개념이다.
소비패턴에서 정규분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양극화다. 설 선물의 프리미엄-가성비 상품의 양극화, 해외여행족-홈설족의 분리는 전형적인 사례다.
평균의 실종에는 양극화 외에도 'N극화'라는 개념도 포함된다. 취향이 다변화하면서 특정상품의 독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설 선물시장 인기상품의 다양화로 나타났다.
위메프의 '2023 설프라이즈' 기획전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설 기획전 TOP10' 상품이 다양해졌다. 지난해 식품·건강 상품 7개, 뷰티 상품 3개가 순위권이었던 것과 달리, 올해에는 뷰티 상품 4개, 생활·주방 상품이 3개, 식품·건강 상품 3개가 'TOP10'을 기록했다. 프리미엄 안에서도 소비자 N명의 취향 N개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상품이 선택받는 셈이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