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에서 혁신 리더로…韓 기초과학의 상전벽해[과학을읽다]

과학기술 연구개발 40년만의 기적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최근 국제 학술 행사를 다녀 온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이구동성 하는 말이다. 잘해야 한국 과학자들을 재빠른 추격자, 즉 '패스트 팔로어' 정도로 여겼던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이 이젠 한국 동료들을 경쟁자 취급하거나 부러워하기까지 하고 있다.

지난 6월 우리나라가 독자 우주발사체 누리호 발사에 성공하자 독일항공우주연구센터(DLR)가 돌연 한국 연구자의 연수를 거부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전까지 후진국으로 생각하고 계속 연수자를 받아줬지만, 이제 '경쟁자'가 된 한국에게 자신들의 속살을 보여주기 싫다는 뜻이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초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 본격 뛰어 든 후 이제 4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괄목상대(刮目相對)'할 만한 성과로 세계 각국을 놀래키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갈 길이 멀지만 국제적으로 한국은 이미 기초과학 혁신 리더 국가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 = 게티이미지

한국 기초과학, '상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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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에만 해도 농업 기반의 일본 식민지로, 전쟁까지 겪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된 것은 놀라운 성취다.

2020년 세계 유수의 학술지 '네이처(Nature)'가 한국에 내린 평가다. 네이처는 우리나라가 그해 블룸버그 혁신 지수 평가에서 독일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2019년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세계 11위 지식재산권 보유 국가로 꼽는 등 놀라운 성취를 잇따라 보여주자 '네이처 인덱스 2020 한국 특별판'을 펴내 집중 조명했다.

네이처는 그러면서 그 비결로 정부의 R&D 예산 집중 투자를 손꼽았다. 투자가 본격화되며 기초과학 연구자 수가 크게 늘어난 점에 주목했다. 이같은 국제 사회의 '달라진 눈빛'은 누리호 성공 발사로 한국이 세계 7번째 우주발사체 보유국 반열에 오르고, 지난 7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성장한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지난 5년간 기초연구 투자 지속 증가…2019년부터 13조원 넘어서

우리나라는 최근들어 기초 과학연구에 대한 투자 확대로 국내 연구자들의 도전적ㆍ창의적 연구가 늘어나면서 학술적 성과도 향상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가 전체의 기초연구 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총 연구개발비 중 기초연구비는 2016년 11조867억원, 2017년 11조3911억원, 2018년 12조1805억원, 2019년 13조623억원, 2020년 13조4481억원으로 늘어났다. 정부의 R&D 예산 중 기초연구 몫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정부 기초연구 예산은 2017년 4조5900억원에서 2020년 5조700억원, 지난해 5조8200억원으로 5년새 1조원 이상 증가했다.

특히 연구자 개인들이 주제를 선정하고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비' 투자가 같은 기간 두 배 가량 늘어났다. 2017년 1조2600억원에서 2018년 1조4200억원, 2019년 1조7100억원, 2020년 2조원, 2021년 2조3500억원, 올해 2조5500억원 등 파격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연구자들도 쑥쑥 성장하고 있다. 세계적 학술 평가 분석 업체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사가 매년 발표하는 피인용 논문 횟수 통계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 리스트에 꼽힌 국내 연구자는 2019년 45명, 2020년 46명, 2021년 55명(분야별 중복 포함)으로 늘어났다. 이 업체는 21개 분야 별로 논문 인용 횟수를 평가해 매년 6000여명을 '최다 인용 연구자(Highly Cited Researchers)'로 선정해 발표한다. 한국의 국가 순위는 2019~2020년 17위, 지난해 15위로 상승했다. 특히 대학에서 국가 지원을 받아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젊은 연구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공계 전임교원 중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사업 수혜자 비율은 2018년 30%에서 지난해 37.1%로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무엇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젊은 교원들에 대한 국가 지원이 확대됐다. 박사 학위 취득 후 7년 이내 또는 만 39세 이하 '젊은 연구자'의 수혜율은 2017년 73.3%, 2018년 73.5%, 2019년 74.9%, 2020년 71.4%, 2021년 74.8% 등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세계 200위권 내에 드는 연구기관의 숫자도 6개로 늘어나 세계 6위권 수준으로 도약했다. 올해 기준 서울대가 59위, 한국과학기술원(KAIST) 67위, 포스텍 126위, 연세대 147위, 기초과학연구원(IBS) 180위, 성균관대 187위 등이다.

연구의 양적ㆍ질적 성장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가 2009~2019년 펴낸 논문 수는 58만8991건으로 2006~2016년 48만9914건보다 20% 증가했다. 피인용 상위 1% 논문 건수도 2009~2019년 5236건으로 2006~2016년 3975건보다 32% 늘었다. 우리나라의 국가 총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논문 수는 2016년 5만9628편에서 2020년 7만6408편으로 1만5000편 이상 늘어났다. 이중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사업으로 펴낸 게 2020년 기준 3만4647건으로 45.3%에 이른다.

국민 안전ㆍ사회 문제 해결 연구 성과 속속

이같은 기초 연구 결과의 학술적 성과는 단지 R&D 수준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지적 진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및 인류 전체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성과를 창출해내고 있다.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와 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등이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속속 내놓은 연구 결과들이 대표적 사례다.

IBS 혈관연구단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코 안 '섬모세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최근 본격화된 비강내 백신 투여를 통한 새로운 코로나19 예방 전략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코로나19의 원인 바이러스인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의 RNA에 직접 결합해 증식을 억제하는 단백질 17종을 발견했다.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는 인체의 면역을 담당한 기억 T세포가 오미크론 변이주에도 면역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백신을 접종할 경우 돌파 감염되더라도 중증으로 진행되지 않는 이유를 밝혀낸 것이다. 또 코로나19가 고령층에게 특히 치명적인 이유도 알아냈다. 연구소는 고령층이 중증 전이에 따른 사망률이 높은 이유가 정상세포까지 공격하는 사이토카인 발현 증가 때문이라는 것을 동물 실험으로 입증했다.

신약 개발에서도 기초과학 연구 지원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다. 천종식 서울대 교수가 다양한 질병치료 및 기존 항암제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를 개발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다. 천 교수와 서울대 생명과학부는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09년 천랩을 설립해 2019년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으며, 이후 CJ 바이오사이언스에 매각했다. 지난 7월 기준 시가총액 1587억원의 '대박'을 터뜨렸다. 천 교수 등이 개발한 마이크로 바이옴 치료제는 독자 발굴한 장내 미생물 생균을 이용해 간암, 대장암에 효과가 있는 신종 균주 CLCC1의 전임상 데이터를 확보한 상태다.

함유근 전남대 교수팀이 인공지능(AI) 머신러닝을 활용해 기상 예측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함 교수팀은 딥러닝 기법을 활용해 기존 기후예측 모형의 오차를 최대 90%까지 줄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장단기 메모리 기법을 응용해 열대 대류 현상의 발생 위치 및 강도를 예측 시작 4주 이후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조동우 포스텍 교수팀의 인체 장기 조직을 만들 수 있는 3D 프린팅을 활용한 적층제조기술도 화제가 됐었다. 조 교수팀은 다양한 인체의 조직ㆍ장기를 제작할 수 있는 3D 세포 프린팅 핵심 원천기술과 인체 조직ㆍ장기 특이적 바이오잉크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구혁채 과기정통부 기초원천연구정책관은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과학기술의 대도약을 뒷받침하는 기초 연구에 대한 장기적 안목의 지속적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우리나라의 기초연구가 인류의 지적 발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ㆍ경제적 가치 증진에 기여하는 대형 성과를 창출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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