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아편전쟁 당시 해전도[이미지출처= 영국 국립해양박물관 홈페이지/www.rmg.co.uk]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중국 근대사 최대의 치욕으로 알려진 1840년 아편전쟁 당시 양방이란 장군은 황제에게 여인들의 요강을 모으면 영국군을 이길 수 있다며 자신을 전선으로 파견해달라고 청했다. 영국군의 대포는 주술사가 요술을 부려 정확도가 높은 것이므로, 주술을 깨는 여인의 오줌을 성벽에 발라두면 정확도가 떨어질 것이란 주장이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임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를 광저우 전선의 부사령관으로 파견토록 추천한다. 이유는 자진해서 싸우러 나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방의 상관으로 황실 종친인 총사령관 혁산 장군도 모든 전투를 부사령관인 그에게 일임했다. 영국 전함 한 척이 26척의 청나라 함대를 포격, 한방에 박살내는 전투상황을 이미 본 청나라 관료들은 모두 자신과 가족의 병을 핑계로 전쟁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 와중에 자진해서 책임을 뒤집어쓰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양방은 광저우로 향하는 동안 의병을 모집해 병력 수는 4만명에 이르렀다. 4000명 남짓인 영국군의 10배였으므로 청나라 조정에서는 무기 격차가 있더라도 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 제대로 된 군사훈련조차 받지 않은 부랑배들과 아편중독자로 구성된 청나라군은 영국군에 연전연패했고, 성벽에 아무리 오줌을 발라봤자 영국군의 대포는 정확히 표적을 명중했다.
꼼짝없이 책임을 뒤집어쓰게 생긴 양방은 이때부터 거짓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매번 청군이 승리한 것처럼 꾸며 보고서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이에 고무돼 더 강경하게 영국군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정작 양방은 영국군과 교전 후 아예 상대가 안된다는 걸 깨달은 뒤 조정 몰래 협상에 나선 터였다. 광저우 주민들의 가산을 약탈해 영국군에게 줄 배상금을 마련하고, 영국군에게 싸울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광저우의 포대 수도 절반으로 줄여버리고 의병대도 해산시켜버렸다.
청나라 조정에서도 전선 감사관들을 통해 해당 사실을 파악했지만, 그를 지적하면 또다시 누군가가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 침묵할 뿐이었다. 곧 영국 정부가 양방이 청나라 조정에 거짓보고서를 올리면서 독단적으로 영국과 협상 중인 사실을 간파했고, 협상이 엎어지면서 그의 거짓말도 끝장난다. 그나마 있던 병력도 양방이 해산시켜버린 청나라는 훨씬 큰 피해를 보고 굴욕적인 난징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요강으로 대포를 막겠다는 허언조차 지적할 수 없는, 관료주의가 낳은 비극이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