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영화 '디서비디언스' 스틸 컷
영화에서 로닛은 유대교 사회에 억눌리고 억압받기를 거부한다. 일찌감치 그녀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뉴욕으로 도피한다. 로닛과 유년 시절 성적 관계를 맺은 에스티의 삶은 이와 판이하다. 로닛과 헤어지고 방황하다가 친구이자 랍비인 도비드와 결혼한다. 유대교의 엄격한 전통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외출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가발을 쓰고, 아이를 낳기 위해 주기적으로 무미건조한 섹스를 반복한다. 그녀가 바라는 삶은 아니다. 로닛과 레베츠 골드파브 부인의 대화 신에서 짐작할 수 있다. "뉴욕에서는 로닛 커티스라고 불린다며?" "그건 일할 때 쓰는 이름이에요." "크루쉬카, 네 본명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니? 넌 그 이름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 에스티가 끼어든다. "여자들은 이름이 늘 바뀌어요. 결혼하면 남편의 이름을 따르잖아요. 그러면서 그들 스스로가 지나온 시간은 사라지는 거죠. 안 그래요?"소설에서 에스티는 두 가지 관점으로 조명된다. 3인칭 산문에 로닛의 1인칭 서술이 끼어든다. "에스티는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고 싶었지만, 미처 그렇게 하기도 전에 반팔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는 사실을 다행히 기억해냈다. 안 될 말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옷을 애초에 왜 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카디건을 벗는다면, 거리를 걷는 동안 팔꿈치가 노출될 것이고, 그 누구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입방아를 찧을 터였다. 그럼에도 날씨는 너무 따뜻했고 그녀의 걸음걸이는 너무 빨랐다." 로닛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에스티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분명히 내가 틀렸던 모양이다. 그래야 정확히 말이 되는 거지. 나는 첫 담배를 끄고 그 다음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중략) 어쩌면 에스티에게도, 그녀가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지도 몰랐다. 사실 나는 지난밤에 그녀가 보인 이상한 태도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고 예상한다.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어지는 일을, 과거에 한두 개 정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영화 '디서비디언스' 스틸 컷
로닛은 에스티와의 사랑을 실제 자신의 마음으로 느꼈던 것보다 더 축소해서 언급한다. 정통파 종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그녀의 욕망 속에서, 그녀가 추구한 반항의 일부로 엮어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사건을 상징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에스티가 현실의 인물이며, 자신이 그녀에게 실제로 상처를 줬음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반대로 에스티는 사건을 실제보다 더 크게 확대해서 받아들인다. 자신의 성적인 영역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로닛과 조우하면서 그 경험에 다시 사로잡힌다고 할 수 있다. 앨더만은 "로닛이 반항과 사랑을 한데 뒤섞어 버린 것처럼, 에스티는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로닛을 뒤섞어 버렸다. 로닛이 자신 안에 그런 감정을 일깨워 낸 유일한 사람인 셈"이라고 했다. "그들 중에서는 도비드가 가장 명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그의 희망은 언제나, 그들 삶에 어떤 의미 있는 움직임이나 변화가 도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영화의 도입부에서 라브는 유대인들 앞에서 연설한다. "율법에서 말하길, 하느님은 천지창조의 엿새를 지냈습니다. 피조물을 만들고 나서 태양이 지기 직전에 세상의 작은 일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중략) 그것은 불복종으로부터 늘 함께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게 됐고, 기로에 있습니다. 천사의 명료함과 짐승의 욕망 사이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특권이자 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도비드는 라브가 설파한 자리에서 연설을 곱씹으며 그녀들의 사랑을 인정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그 순간 에스티는 자유를 얻고, 로닛은 아버지의 딸로 인정받는다. 도비드는 그녀들처럼 불복종의 존재가 된다. 용서와 화해로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듯하지만 멀리서 보면 제자리걸음이다. 사랑과 교리가 한데 섞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