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unter]'포샵질' 없던 조선시대 초상화엔 딸기코 선비가…

이성낙 교수의 책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태조 어진

[아시아경제 노태영 기자]"태조는 기록에 의하면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큰 귀가 아주 특이하다고 하였다. 태조 어진을 보면 넓은 광대뼈에 눈과 입이 작으며 양쪽 귀가 큰 모습이다. 오른쪽 눈썹 위에는 사마귀가 그려져 있어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전주 경기전 안내판에 적혀 있는 '태조 어진'(국보 제317호)에 관한 설명 중 일부분이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1335~1408)다. 어진은 왕의 초상화다. 나라를 세운 왕의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왕실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다. 태조의 어진은 다양한 형상으로 그려져 전국 곳곳의 사당에 봉안됐다. 하지만 변란과 전쟁으로 소실돼 현재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만 남아있다.흥미로운 점은 '오른쪽 눈썹 위 사마귀'라는 글귀이다. 언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한 나라를 세운 왕의 초상화는 완벽해야 된다는 편견 때문이다. 실제로 왕의 얼굴에 사마귀 같은 피부병이 있다고 해도 이를 그대로 그린다는 건 결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요즘 취업준비생들도 증명사진을 찍고 난 후 포토샵 등으로 외모의 부족한 부분을 보정하는 게 흔하다.이성낙(80) 교수는 최근 내놓은 책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에서 '태조 어진'에 대해 "다시 어진을 자세히 살피니 정말로 오른쪽 눈썹 위에 지금 약 0.7~0.8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혹, 즉 모반세포성모반이 있다"며 "참으로 가슴 벅찬 장면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모반세포성모반'이란 전문 의학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이 교수는 의사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피부과 전문의와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주임교수,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ㆍ의무부총장, 가천대학교 명예총장, 국제베체트학회 회장을 지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가 2014년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저자는 의사가 환자를 보듯 조선시대 초상화를 들여다봤다. 피부과 전문의 연세대 방동식 교수, 아주대 이은소 교수와 함께 초상화 519점을 표본으로 삼았다. 그 중 보존 상태가 불량한 것을 제외하고 368점을 대상으로 진단을 내린 결과, 268점에서 20종에 달하는 다양한 피부병변을 발견했다. 점(113점), 검버섯(85점), 돌출된 검버섯(37점) 등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천연두 흉터(73점), 만성간질환의 결과 나타나는 흑색황달(9점) 등은 조선시대 질병역학 연구에도 유용하다. 함께 참여한 방동식 교수는 "피부과 전문의 두 명과 함께 객관적 확인 절차를 밟은 것은 이 책이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근거 중심의 자료가 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로 불릴만하다. 국보로 지정된 '태조 어진'과 '윤두서 자화상' 등 다섯 점,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는 일흔 점에 달한다. 대상 인물의 결점을 감추거나 미화하는 경우가 많았던 다른 문화권의 초상화와는 달리 조선시대 초상화는 사실 그대로의 묘사에 충실했다. 감추고 싶은 피부병도 그대로 가감 없이 드러낼 정도로 엄밀한 원칙을 세웠다.

홍진 초상

예를 들어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필한 홍진의 초상화를 보면 코가 주먹만큼 크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다. 딸기코종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비류'를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홍진이 콧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덴리대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명항 초상' 속 오명항은 얼굴이 시커멓다. 간질환이 악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흑색황달'을 묘사한 것이다.

송창명 초상

'송창명 초상'은 얼굴 곳곳이 하얗게 그려졌다. 마이클 잭슨이 앓았던 것으로도 유명한 '백반증'이다. 하얗게 변한 피부의 가장자리가 약간 거뭇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백반증이 퍼져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계과색소침윤'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밝혀내 독일의 피부과학 학술지에 발표했다. '송창명 초상'은 백반증을 보여주는 세계 최초의 그림 기록으로 인정받았다.저자는 조선시대 초상화가들이 왜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렸는지에 주목했다. 결론은 '선비정신'. 그는 "바탕에는 물론 조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남겨 효를 실천하려는 유교 전통이 깔려 있고,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서도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그 원칙이 중국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실천됐고, 이것이 조선이란 나라를 이끌어간 선비정신 덕분"이라고 진단했다.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은 조선을 이끈 이들의 '정직함, 올곧음'의 증거란 설명이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양 유화의 초점이 인물화였듯, 조선시대 그림의 정화는 선비들을 그린 초상화였다"며 "조선시대 초상화는 인물의 정체성을 담는 데 지성이어서 인품까지 담았다"고 설명했다.저자는 우리 초상화를 서양과 중국, 일본 등 다른 문화권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봤다. 영국 런던의 국립초상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초상화 1400여 점을 검토한 결과, 피부병변이 묘사된 것은 일곱 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국의 경우 명나라 때는 대상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했으나 조선시대 초상화의 수준의 정직성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일본은 정형화된 화법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기에 피부병을 관찰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는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에 대한 연구는 피부병과 초상화 모두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조선시대 초상화의 사실정신이 얼마나 철저했는가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다. 미술사와 의학이 만난 이 책은 학제 간의 통섭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웅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이성낙 지음/눌와/1만8000원)노태영 기자 factpoet@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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