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비로소/이서화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 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 만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 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곳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한 알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그림=이영우 화백

 ■'비로소'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전까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사건이나 사태가 이루어지거나 변화하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사전에 적힌 용례들을 보면 시에 적힌 "오랜 기다림"과 "그 어리둥절한 곳"이라는 결이 좀 다른 맥락들이 이 단어 안에 서로 스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어머니의 굳은 얼굴이 환해졌다"와 같은 사례가 그렇다. 이 문장 속에는 세 가지의 사실이 있는데, 하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만큼 어머니가 아들의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예외적이고 부가적인 사태다. '비로소'는 한편으로는 어떤 과정 혹은 흐름을 품에 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느닷없는 단절도 포함한다. 한마디로 '단속적(斷續的)'이다. 그런 만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비로소'들이 숨어 있다고, 다만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을 뿐이라고.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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