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의 행인일기 49] 파주에서

윤제림 시인

이렇게 생긴 한자가 있습니다. '串.' 두 가지로 읽습니다. '꿸 관' 또는 '땅이름 곶'. 곶감이라 할 때의 '곶'입니다. 지명으로 쓸 때는 대개, 뭍으로부터 길게 튀어나온 바닷가 동네 이름 끝에 붙이지요. 호미곶, 장산곶처럼. 조선족 동포들이 꼬치를 일컫는 '뀀'이란 말과 같은 뜻의 한자이기도 합니다. 연변에 가면, 그 두 글자가 나란히 적힌 간판이 많습니다. '뀀'과 '串'. 꼬치구이 집입니다. 글자의 생김에서, 꼬챙이에 길게 꿰인 양고기가 떠오릅니다. 곶감을 한자로 '관시(串枾)'라 부르는 이치도 단박에 이해됩니다. 무청이 엮여서 시래기가 되는 모습과 북어 한 쾌, 굴비 한 두름도 겹쳐집니다. 한 줄에 매달렸으니, 떠나온 곳도 같을 테지요. 같은 고장, 같은 밭, 같은 나무, 같은 바다에서 나고 자랐을 것입니다. 한 집안, 일가붙이들이 헤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왕이면 같은 새끼줄, 같은 나뭇가지에 매달리려고 애를 쓸 것만 같습니다. 사람의 '두름'을 생각합니다. 불편하고 불손한 상상을 이 글자가 허락합니다. '관(貫)'. 역시 '꿸 관' 자(字)입니다. '본관이 어디냐' 물을 때의 '관'입니다. 이런 질문과도 통합니다. "너는 어떤 줄에 꿰어진 사람인가?" "너를 꿰고 있는 나뭇가지는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가?" 그곳이 '관향(貫鄕)'입니다. 진짜 고향이지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삶을 요약해놓은 '졸기(卒記)'나 '행장(行狀)' 첫 대목에서, 그런 뜻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성씨(姓氏)가 시작된 땅이 자신의 '태(胎) 자리'이며 '본가'임을 말해줍니다. 어디서 났든, 전주 이씨는 무조건 '전주 사람'입니다. 이순신의 전기는 '덕수'에서 시작됩니다. "…덕수인(德水人)…" '덕수'는 오늘날 황해도 개풍의 옛 이름, 충무공은 덕수 이씨지요. 서울 건천동에서 나고, 충남 아산 외가에서 자랐지만, '덕수 사람'이라고 적습니다. 근본을 따지자면, 이순신은 개성 사람입니다. 저는 파주 사람입니다. 본관 '파평'은 지금의 파주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여기에 오면 마음이 참 편안해집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육신과 제 몸이 하나로 꿰어지는 환각을 경험합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며 감정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 설지 않은 기억의 일렁거림이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백 년 전 할아버지들에게 오늘의 저와 묻고 대답할 얘깃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저, 당신들을 찾아온 후손을 기특해할 뿐이겠지요. 지금 저는, 보이지 않는 손 하나가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은 어쩌면, 오늘 제가 여기에 온 까닭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무척 보람찬 일을 했습니다.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일입니다. 양친의 '돌아가 쉴 곳'을 관향에서 찾았습니다. 천주교인인 두 분께 무척이나 마땅하고 바람직한 집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노선버스도 있습니다. 주변에 명소도 많아서, 나들이 길에 들르기도 쉬울 것입니다. 납골당이지만, 여느 곳과는 좀 다릅니다. '민족화해센터'가 지은 성당의 부속시설입니다. 제 부모님의 새 주소는 그렇게 근엄한 이름의 지붕 밑입니다. 두 분 사이도 절로 평화로워질 것 같습니다. 더 가볍고 투명한 혼백이 되실 것입니다. 아무튼 큰 축복입니다. 죽는다고, 누구나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 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죽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념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인습과 편견과 오해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죽음들. 아무런 값도 매길 수 없는 것들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신화 속의 신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저승의 사람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란 이름이 많은 것을 일러줍니다. 헝클어진 매듭을 푸는 최선의 방법 하나는, 어린이가 되는 일. 세상에 나와 처음 가졌던 마음의 주인공으로 돌아가라고 일러 줍니다. '참회와 속죄'의 이치가 그것이지요. 남과 북, 이승 저승의 벽을 허무는 연장 또한 반성과 성찰 밖에 더 있겠습니까. 겉모습은 신의주 어느 성당을, 내부 디자인은 함경도 어느 수도원의 내부를 본떠서 지었다지요. 이땅 천주교 역사의 한 세기가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성당 문을 열면, 손톱만한 타일 그림들을 모아서 붙인 모자이크가 보입니다. 남쪽 화가가 그리고, 북의 예술가들이 완성했다는 거대한 성화(聖畵)입니다. '남북 합작'입니다. 문과 창호는 전통 문양을 많이 살렸습니다. 연화문(蓮花紋)이 특히 곱습니다. 바티칸 어느 성당 돌확에 피었던 연꽃 생각이 납니다. 부안 내소사 대웅전 문살무늬도 떠오릅니다. '내 것, 네 것'의 분별심이 스러집니다. 갈등과 대립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파주 역에 신의주행 기차가 들어와 멈춥니다. 북경과 시베리아를 지나, 파리까지 가는 길도 보입니다. 사해(四海) 인류가 하나로 꿰어지는 꿈입니다.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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