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죽인 여자, 아비를 죽인 남자…연극 무대 오르는 에우리피데스·도스토옙스키의 비극
<메디아>사랑에 배신당한 여인의 복수…이혜영이 악녀 메디아役 맡아<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신과 인간·탐욕과 용서 그려내…정동환이 장로·식객 등 1인4역
'메디아'는 그리스 시인 에우리피데스가 쓴 비극이다. 배우 이헤영이 남편 이아손에게 버림받은 뒤 분노에 사로잡혀 두 아들을 살해하는 메디아 역을 맡았다.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신들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기대한 것은 절대로 이뤄지지 않고,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것이 일어나게 된다. 꼭 이곳처럼."('메디아'의 대사)사랑과 탐욕이 빚은 두 죽음.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BC 484~406 추정)가 쓴 '메디아'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연극으로 관객을 만난다. 친자 살해와 친부 살해를 저마다 주제로 삼은 두 작품은 사랑과 배신, 유신론과 무신론, 탐욕 등 인간 내면의 치열한 고투를 대서사시로 펼쳐 보인다. 2017년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다시 태어난 이 비극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비극의 보편성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섬뜩함, 비(非)현실이라는 자각에서 오는 안도감을 오가는 사이 사랑과 가족, 신이라는 오랜 화두는 어느덧 '모호하고 확신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 된다.어디선가 들려오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 메디아는 모든 걸 걸고 사랑한 남편 이아손이 자기를 버리고 크레온 왕의 딸과 정략 결혼한다는 소식에 깊은 분노와 상실감을 느낀다. 후환이 두려운 크레온 왕은 메디아에게 두 아들과 함께 코린토스를 떠나라고 명령한다.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고 이아손과 결혼한 메디아는 달리 갈 곳이 없는 이방인이다. 이아손은 자기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메디아를 오히려 질타하며 "이게 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분노는 슬픔으로, 슬픔은 무기력으로, 무기력은 다시 분노로 회오리치며 파국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사랑이란 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메디아의 대사)" 바로 이때 헝가리 출신 연출가 로버티 알폴디(50)의 시선은 메디아를 바라보는 주변으로 옮겨간다. 원전(原典)이 악녀 메디아의 단일 캐릭터에 집중돼 있다면 알폴디는 그녀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사회와 주변인들을 조명한다. 여성 열여섯 명이 맡은 코러스는 극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작품에 깊게 개입하며 극의 흐름을 이어간다. 이들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메디아의 처지를 동정하다가도 그가 흥분을 못 이겨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걱정과 함께 비난을 퍼붓는다. 무정한 여자라는 등 저마다 한 마디씩 쓴소리를 던지는 모습은 남의 일이니까 쉽게 판단하고 떠드는 TV 밖 대중의 얼굴을, 욕망을 짓밟혀도 어미의 자리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을 떠올리게 한다.
연극 '메디아' 공연 모습.
메디아는 결국 이 사회가 요구하는 온갖 강요를 뿌리치고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위기에 몰린 순간 우연히 만난 아이게우스에게 후손을 약속하며 살길을 찾다가 끝내는 모성(여성성)을 포기하며 자기의 복수를 실현한다. 이처럼 욕망과 자유를 좇는 오늘의 메디아는 배우 이혜영(55)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게 됐다. '헤다 가블러(2012년)'와 '갈매기(2016년)'를 통해 연극배우로서 입지를 다진 그는 이번 무대에서 모든 것을 잃고 고립된 한 여자가 느끼는 공포와 광기를 다층적으로 그려냈다. 요염하다가 일순간 난폭해지고, 다정한 어머니였다가 금세 자기의 욕망에 충실한 메디아를 통해 사랑과 배신이 주는 달콤함과 쓴 맛을 긴 스펙트럼 속에 켜켜이 드러냈다. 이혜영은 작품 메디아가 여자이자 인간, 배우로서 모든 걸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지난달 25일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식을 죽인 메디아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관객들이) 그녀를 이해하도록 노력했다"고 했다.휑한 벽과 복도, 여러 출입문 등 흡사 병원 대기실을 연상케 하는 무대 배경에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 진태옥이 디자인한 일상복이 더해지면서 작품과 관객 사이의 시간적ㆍ심리적 거리는 한층 더 좁아졌다. 알폴디는 개막을 앞두고 열린 간담회에서 "한 인간의 비극을 초래한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서 "사랑은 한없이 아름다워질 수도, 지독하게 끔찍해질 수도 있지만 이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이라고 강조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극단 '피악'의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장장 7시간에 걸친 대작으로, 김태훈이 드미트리(왼쪽), 박윤희가 표도르를 연기한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극단 피악(나진환 연출)이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로 2010년 알베르 카뮈가 각색한 '악령'과 2012년 '죄와 벌'에 이어 세 번째 선보이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이다. 세 권으로 구성된 소설의 주된 내용은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시골 지주 카라마조프 집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변론 과정이다.사건의 중심은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장남 드미트리지만 진짜 주제를 표상하는 인물은 차남인 이반과 삼남 알료사라고 작가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소설은 무신론자이자 허무주의자인 이반과 수도원에서 신앙의 길을 걷는 알료사를 통해 신인사상과 인신사상 등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핵심 인물은 스메르자코프. 표도르와 백치 여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표도르에 대해 깊은 분노를 지니고 있다. 이반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를 죽이지만 간질 발작 때문에 혐의에서 벗어난다. 이후 아버지와 크게 반목했던 드미트리가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그는 아버지를 증오한 마음의 죄를 인정하듯 20년형을 순순히 선고받는다.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주인공들이 벌이는 행위 논쟁 속에는 인간 내면의 온갖 모습과 모순이 파편처럼 녹아 있다. 정신과 육체, 무신론과 유신론 등 대립하는 가치들 간의 갈등도 각 인물을 통해 드러낸다. 연극은 원작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의 탐욕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신이 만든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이반의 말은 신과 인간, 탐욕과 용서 등 일상의 뒤편에 파묻은 묵직한 주제들을 관객들에게 환기한다. 나진환은 "원작이 가지는 거대한 인문학적 힘을 연극적 언어로 충실히 재창조했다"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대중들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메디아'는 4월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이혜영을 비롯해 하동준(이아손), 남명렬(아이게우스), 박완규(크레온) 등이 출연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4~19일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공연 시간이 1, 2부 각 3시간30분씩(중간 휴식시간 포함) 일곱 시간이나 된다. 중견배우 정동환(68)이 도스토옙스키와 조시마 장로, 대심문관, 식객 등 1인 4역을 맡는다. 원작에 없는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을 소개하는 역할이다. ☞자세히 알기: 메디아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메디아는 흑해의 동쪽 끝 콜키스의 공주, 이아손은 코린토스 북쪽 이올코스의 왕자였다. 이아손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어린 나이에 삼촌인 펠리아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성인이 돼 왕권을 되찾으려 하는 그에게 펠리아스는 "권좌를 넘겨줄 테니 콜키스에 가서 황금 양털을 가져와라. 왕이 될 자격이 있나 보자"고 했다. 이아손은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감행한다. 메디아는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해 남동생을 살해하면서까지 그를 돕는다. 황금 양털을 손에 쥔 뒤에도 펠리아스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자 메디아는 또다시 계략을 짜 그를 해치고 이아손과 함께 코린토스에 정착한다.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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