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미야 마사요시 일본은행 이사…일본은행 차기 총재·부총재로 유력
[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에서 '미스터 BOJ'로 불리는 이가 있다. 아마미야 마사요시(雨宮正佳ㆍ61) 일본은행 이사가 바로 그다.금리 및 2%라는 인플레이션 목표 관리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아마미야 이사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의 임기는 내년 4월 8일까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구로다 총재와 두 부총재를 다른 인물로 교체할 듯하다. 이런 가운데 아마미야 이사가 총재 혹은 부총재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다.그는 2012년 부총재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동료인 나카소 히로시(中曾宏)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아마미야는 도쿄(東京)대학 정제학부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은행에 들어갔다. 이후 줄곧 강력한 권한을 지닌 기획국에서 정책입안에 관여해왔다.정책위원회의 9인 위원만 제외하면 일본은행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지닌 인물이 아마미야 이사다. 그가 속한 기획국은 정책을 입안한다. 그는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금융시장국도 이끌고 있다. 금융시장국은 금융상품을 사고 파는 부서다.아베 총리의 경제고문인 혼다 에쓰로(本田悅朗) 전 시즈오카(靜岡) 현립 대학 국제학부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아마미야 이사에 대해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라며 "프레젠테이션 실력은 물론 전략 구상 능력도 탁월한 원칙론자"라고 평했다.
아마미야 마사요시(雨宮正佳) 일본은행 이사(사진=블룸버그뉴스).
아마미야 이사는 법조계 인사, 고위 관리, 이코노미스트들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시야가 넓다. 후지쓰(富士通)종합연구소의 하야카와 히데오(早川英男) 수석 연구원은 "일본은행 관리들 가운데 아마미야 이사가 총재나 부총재로 가장 적합하다"며 "빈틈없는 그의 성격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추켜세웠다.반면 아마미야 이사가 정책을 입안하고 윗선에서 결정된 정책을 수행하는 데 탁월하지만 스스로 나서 의제를 정하는 유형은 아니라는 평도 있다. 지도자로서 그의 능력을 가늠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나카하라 노부유키(中原伸之) 전 일본은행 정책위원은 "아마미야 이사가 매우 유능한 관리지만 앞장서 나아가는 타입은 아니다"라면서 "새로운 정책방향이 정해지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그의 역할"이라고 꼬집었다.아마미야 이사의 또 다른 강점은 유연성이다. 그는 여러 총재를 모셨다. 구로다 총재와 전임자인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전 총재의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시라카와 전 총재의 접근법은 덜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아마미야 이사는 공격적인 '아베노믹스'의 바탕이 된 아이디어들을 시라카와 전 총재 재임기에 이미 거론한 바 있다.일본은행 이사 자리는 아마미야에게 두 번째 주어진 것이다. 일본은행 이사를 두 번 맡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그가 이사직에 처음 앉았을 때 도입한 정책 가운데 하나가 2010년의 이른바 '포괄적 금융완화'다. 신설한 35조엔(약 351조1600억원)의 자산매입 기금으로 일본 국채, 상장지수펀드(ETF), 리츠(REITsㆍ부동산 투자신탁)를 직접 사들인 것이다.그보다 10년 전에는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린 지 몇 개월도 안 돼 이를 다시 내리고 양적완화 정책을 채택하는 데 그가 크게 한몫했다.히토쓰바시(一橋)대학 경제학과의 후카오 교지(深尾京司) 교수는 "아마미야 이사가 인플레를 유도하기 위해 통화공급 확대만 주장하는 통화주의자는 아니다"라며 "그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꿀 줄도 안다"고 말했다.아마미야 이사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은행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미국ㆍ일본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은 1985년 9월 22일 발표된 '플라자 합의(Plaza Accord)'에 따라 시장개입으로 미국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마미야 이사는 2012년 일본은행 오사카(大阪) 지점장으로 잠시 일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시라카와 전 총재에 의해 좌천됐다 구로다 총재 취임 이후 구원 받은 것이라고 쑥덕거렸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단지 지점 운영을 경험해보고 싶어 오사카로 건너간 것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가 오사카로 간 것은 당시 극우 정치인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소문도 있다.아마미야 이사 가문의 본거지는 도쿄 서쪽 야마나시(山梨)현이다. 19세기 그의 집안은 철도사업에 손대기도 했다. 아마미야 이사는 '자본가 가문' 출신인 것이다.도쿄 소재 명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가 낙제점을 받은 과목이 하나 있다. 화학이다. 담당 교사는 일본은행 관리의 아버지였다.아마미야 이사와 그의 부인은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나 자랐다. 같은 학교를 다닌 두 사람은 대학 졸업 후 얼마 안 돼 결혼에 골인했다. 이들을 사랑으로 묶은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다.아마미야의 애초 꿈은 음악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부모가 음대에서 날아온 입학지원서를 가로채 숨겨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미야는 결국 명문 도쿄대학 경제학부로 방향을 틀었으나 부인은 계획대로 음대에 들어갔다.아마미야 이사는 지금도 음악을 사랑한다. 그는 1주에 2~3차례 피아노를 연주한다. 좋아하는 작곡가는 러시아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 헝가리의 벨라 바르톡(1881~1945)이다. 이진수 기자 commu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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