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로비스트의 세계③]대기업 A부장의 명함…앞면엔 對官, 뒷면엔 로비스트

[아시아경제 고형광 기자] 국내 대기업에서 대관(對官) 업무만 12년째 담당하고 있는 A 부장. 그는 오전에 눈을 뜨자마자 회사로 출근해 전날 만난 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다듬어 윗사람에게 보고 한다. 전날 모 국회의원 보좌관과의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지만 숙취를 달랠 여유조차 없다. 고급 정보일 경우 최고경영자(CEO)의 호출을 받아 따로 설명하기도 한다. 오전 보고가 끝나면 주 활동무대(?)인 국회로 건너가 또 다른 의원실의 보좌진들과 접촉을 시도한다. A 부장은 "점심, 저녁은 늘 약속이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쉽게 친해지려고 낮술도 마다하지 않아 속병 하나씩은 달고 사는 게 기본"이라고 전했다. 그의 수첩에는 평일엔 점심ㆍ저녁 약속이, 주말엔 골프 약속 등이 가느다란 글씨체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약속이 수시로 바뀌는지 지웠다가 다시 적어 놓은 흔적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는 "관련 부처나 이해관계자와 직접 만날 수 있으면 최선이지만, 만약을 대비해 해당하는 곳의 소식이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언론, 검ㆍ경찰, 국세청, 국정원 직원 등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며 "급할 경우에는 친인척의 인맥을 이용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한번 대관업무를 맡으면 오랜 기간 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 인맥관리나 업무 공백을 우려한 때문이다. 때문에 가정은 언제나 뒷전일 수밖에 없다. A 부장은 바쁜 일정으로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줘 본 기억이 없는 것이 너무 아쉽고 미안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식에게 아빠가 하는 일을 떳떳이 밝힐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니 딸아이는 아빠가 단지 영업활동을 하는 걸로만 안다"며 "아빠가 사회에서 '을'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A 부장과 같이 10대 그룹에서 대관을 담당하는 임직원은 어림잡아 1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고유 대관업무만 하는 담당자는 20~30명 내외이지만, 사안에 따라 홍보, 구매, 재무(국세청), 사업별로 대관 활동을 펼치는 데다 계열사별로 필요한 대관 활동을 한다. 이들은 경영에 영향을 주는 정책 변화를 사전에 감지하고, 정책결정 기관에 미리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유리한 쪽으로 유도하게 하는 게 주 업무다. 입법ㆍ사법ㆍ행정 기관을 넘나들면서 잦은 소통과 접촉으로 기업과 정ㆍ관계 간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A 부장은 "대관업무는 국세청이나 검찰 등에서 수사가 들어왔거나 국정감사 때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다"며 "오너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 등이 발생하면 대관팀 전체가 움직이기도 한다"고 전했다.A 부장처럼 자신이 속한 조직을 위한 로비 활동, 예컨대 대기업 등에서 하고 있는 '대관 업무'는 용인되고 있다. 그래서 기업, 협회 등 이익단체들은 전직 고위관료 등을 자기 조직에 취업시켜 로비스트 역할을 맡기고 있다. '대관'이란 이름으로 포장만 했을 뿐 로비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형 로펌이 전직 고위 공무원을 고문 등으로 영입해 국회의원이나 입법조사관에게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활동을 하는 게 대표적이다. 물론 여기에는 식사 제공, 선물 등도 뒤따른다. 이런 점을 들어 일부에서는 차라리 로비를 합법화한 뒤 투명성을 높이는 게 낫다는 주장을 편다. 실제 미국 등 일부 국가는 로비스트가 자신의 신상을 등록한 뒤 합법적으로 활동을 한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로비스트가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선 대관팀이라는 태스크포스(TF)가 정부나 국회를 상대로 막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며 "지금처럼 로비를 불법으로 규정하면 대관 조직을 운영하는 대기업만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민의 청원권을 보장하고, 알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로비 법제화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한 기업 관계자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들은 사실상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며 "미국처럼 전문 로비스트가 생긴다면 지연, 학연 등과 관계없이 청원을 접수할 수 있고 여러 중소기업이 힘을 모아 의견을 표시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했다.고형광 기자 kohk0101@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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