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미국 수도 워싱턴 D.C.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대부분 공짜여서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보스턴으로 이어지는 미국 동부 도시 여행을 워싱턴 D.C.에서 시작하면 손해 보는 느낌을 저절로 갖게 된다. 다른 데에는 공공 전시기관이 공짜인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워싱턴에는 사립 전시공간도 상당히 많은데 그중에서 최근에 가본 곳은 미국 최초의 근현대미술 미술관이라고 하는 필립스컬렉션이다. 근현대미술이라고 하니 피카소 그림이 빠질 리가 없는데 예전부터 미술관에서 피카소 그림을 마주칠 때마다 늘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엄청 노력과 수고가 들 텐데, 이렇게 개념적으로 그리면 왠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오늘도 미대 입시를 치르는 우리 딸은 거의 하루 열 시간 오른쪽 어깨가 빠지고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피카소처럼 그려도 된다면 그런 헛수고가 따로 없겠다. 나 같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당연히 예견해서인지 피카소는 자기가 사실적인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니고 안 그리는 것이라는 취지로 응수한 바 있다. 이미 자신이 열다섯 살 때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 미술관의 근현대 섹션을 가게 되면 피카소가 어렸을 적 그린 그림들을 무척이나 열심히 찾아보았다. 근데 아쉽게도 피카소의 어렸을 적 그림들은 못 그린 것은 아니지만 내 눈에는 사실의 재현이라는 면에서는 라파엘로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필립스컬렉션에서 본 피카소 초기작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작품 아래 설명을 읽다 보니 이런 일화가 나왔다. 피카소의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매일 비둘기의 발을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추상화는 그렇게 한 사물을 끈질기게 보다가 태어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무척 컸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바르셀로나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는데, 말을 하기도 전에 그림을 그렸다는 피카소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피카소에게 전통적인 사실 재현 위주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피카소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에 열세 살에 최연소로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이 입학시험은 보통 한 달 동안 보았는데 피카소는 일주일 만에 마쳤다. 아들의 실력에 너무 놀란 아버지는 아들에게 붓과 팔레트를 넘겨주면서 더 이상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너무 어려서 결국 입학은 못했지만 피카소가 사실 재현에 상당한 실력이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피카소의 입체화는 파격적이지만 거기에는 수백 번 반복해 그린 비둘기의 발이 있었다. 요즘처럼 혁신과 창조가 아니면 시답잖게 보는 세상에서 이러한 반복의 가치를 제대로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첫사랑, 첫눈, 첫아이 등 '처음'을 유독 강조하는 말 쓰임새만이 아니라 신제품, 혁신, 신산업, 새정치 등등 이래저래 새 것이 우월한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보면 무수한 반복의 연속이다. 하루를 시작하면 배우자, 자녀, 직장동료 등 늘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얼추 비슷한 시간에 대체로 같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 몇 년 전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 문득 김연아 선수가 대학으로 돌아가 낯선 공부를 하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지닌 분이 쓴 칼럼을 읽었다. 그에 따르면 정작 힘든 것은 운동을 하다가 책상에 앉아 시험 공부하는 게 아니라 대학 생활의 '지루하고 시들한 것'의 진수를 깨달을 만큼 평범히 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장 돈도 명예도 업적도 될 수 없는 것들에 '턱없이 진지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새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겹도록 다시 또 다시 비둘기의 발을 그리고 있는 세상의 모든 피카소들에게 또 다른 한해가 시작된다.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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