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응 건설부동산부 차장
어린 시절 동전 몇 푼이라도 생기면 냉큼 동네 만화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한동안 무협만화에 푹 빠졌었다. 제목이 다르지만 내용은 사실 거의 엇비슷했다. 멸문지화의 대환란 속에서 어린 주인공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비루한 신세로 지내다 대개는 우연찮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몸이 망가지지만 또 한 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백발노인이 보이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유폐된 과거 무림 최고의 고수다. 그에게서 주인공은 엄청난 내공과 함께 비밀리에 전해지는 극강의 무예를 익히고, 휘두르면 천지가 진동하는 보검 따위를 얻는다. 다시 세상에 나온 그에게 거칠 것은 없다. 웬만한 무림 고수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제압한다. 마치 생존의 이유인 것처럼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한 발 한 발 다가갈 뿐이다. 가족을 모두 잃게 하고 자신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절대 악과의 마지막 승부에서 주인공은 모든 공력을 쏟아붓고,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극단적인 비극과 드라마틱한 반전, 화산처럼 분출하는 분노에 감정이입하고 카타르시스도 느꼈으리라. 10여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 다녀왔었다. 그 어떤 곳보다 가슴 설레는 이름의 도시 아니던가. 과문한 탓에 말끔히 정돈된 모습만 상상했다가 어질러진 거리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유가 넘치는 파리의 매력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와 몽마르트르언덕의 낭만적 풍경은 지금도 오롯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쉬고 있는 루브르는 프랑스의 내공을 제대로 보여줬다.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지난 주말 파리 테러는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서방 세계를 비롯해 다수 인류가 꿈꾸는 낭만의 심장부가 난도질당했다. 공연장과 카페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더욱 몸서리가 쳐진다. 이제 세계에서 안전한 곳이란 없다.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 등 국제연합군이 대대적인 보복 공격에 나서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휘몰아친다. 막강한 서방 국가들에게는 응징 외에 다른 카드가 존재할 수 없다. 두려운 것은 피의 악순환이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한다. 9ㆍ11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 세력의 뿌리를 뽑겠다고 나섰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지만, 주지하다시피 테러는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IS 같은 극단적 테러리스트들을 도려내는 것이 지구적 과제이지만 더 지독한 복수의 덫에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파리 시민들은 자녀들에게 또래의 무슬림 친구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 앞에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을 뿌리지 않으려는 몸부림 또한 인류의 과제다. 박철응 건설부동산부 차장 hero@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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