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칼럼]진보(眞保) 대 진보(進步)

이명재 논설위원

우리 사회에서 특히 잘못 쓰이고 있는 말 중의 하나로 나는 '보수'라는 용어를 꼽고 싶다. 가령 '보수 단체'라는 이름을 내건 어떤 단체의 시위나 발언을 접할 때 나는 과연 거기에 내가 아는 한의 보수가 있는지가 매우 의심스럽다. 보수라는 말을 굳이 쓰려고 한다면 그 앞에 '이른바'나 '자칭'을 붙여 '이른바 보수' '자칭 보수'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컨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극히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들을 차마 보수라고 할 수는 없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보다 민족이며 인간의 존엄이어야 할 텐데 나라의 주권과 민족의 자주를 부인하는 듯한 친미(親美)ㆍ친일(親日) 사대의 행태, 인권의 억압에 대한 찬동을 넘어 선동을 보이는 이들을 도저히 보수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보수는 현실과 현재에 대해 대체로 긍정하고 그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를 절대 긍정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짜 보수라면 현실의 문제를 늘 고치고 수리해야 한다. 그런 '보수(補修)' 공사 없이는 진짜 보수가 못 된다. '보수를 하지 않는 보수'의 위험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보수에는 고쳐야 할 현실, 보수함으로써 보수할 가치를 갖게 되는 보수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보수라고 자임하는 이들의 행태에 실망스러운 것은 누가 봐도 극우 내지 몰상식한 집단이 발흥할 때 보이는 태도다. 보수를 욕되게 하는 이들, 보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이들이 창궐할 때 진짜 보수라면, 건전한 보수라면 그걸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보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보수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보수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보수는 사이비 보수, 유사(類似) 보수에 대해 결코 제동을 걸지 않는다. 그들을 꾸짖지 않는다. 자신들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며 그들과 함께한다. 사이비 보수와 연대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 역시 같은 부류임을 보여주고야 만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긴급하게 필요한 한 가지는 '진보(眞保)'의 등장이다. 즉 진짜 보수로서의 진보의 출현이다. 진정한 보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 자기 잘못을 교정할 때 발전이 있다는 것을 아는 보수, 그런 '진보'가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세상을 바르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정명(正名)'을 들었다. "지금 만일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다른 형체의 물(物)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각각 멋대로의 명칭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 잡다하게 서로 다른 만상에 대해서는 명(名)과 실(實)이 혼란되고 엉키어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이 흐려지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이는 공자가 정치의 시작으로 얘기한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을 잇는 것이었는데 결국 세상 모든 일의 출발은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 정의(定義)를 제대로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보수가 보수라는 이름에 값하는 보수가 되는 것, 보수가 보수답게 되는 것, 거기에 우리 사회의 발전과 진보의 한 길이 있다. 보수 없는 보수가 지배하는 사회, 보수의 부재와 결핍.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보수' 집단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빈곤한 보수를 있게 하는 한 기반, 거기엔 빈곤한 진보가 있다. 자칭 보수의 맞은편, 그 상대편의 진보의 빈곤이 결국 보수의 빈곤을 받쳐주는 한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眞保)의 부재에 대한 지적과 질타, 그것은 결국 진보(進步) 진영의 자기반성이어야 한다. 건전한 진보(眞保)의 출현은 진정한 '진보(進步)', 역량 있는 진보(進步), 더욱 진보다운 진보가 있을 때 상당 부분 가능할 것이다. '진보(眞保)'는 결국 진보(進步) 진영의 거듭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보(眞保) 대 진보(進步)', 그것이 보고 싶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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