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1997년 외환위기, 은행들 몸부림치며 체질 바꿔

금융산업 발전기 - 국제화시기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우리나라의 은행은 1945년 광복 후 한국전쟁 등 혼란의 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뒤에는 국가 경제의 부침과 궤를 함께 했다. 경제가 급성장 할 때는 원활한 자금공급의 역할을 맡았지만 1990년대 후반 경제가 곤두박질 칠 때는 대마불사였던 은행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과 은행의 역할=1960년대 우리나라 경제를 설명하는 단어는 '개발'과 '성장'이다. 여기에 맞춰 은행의 역사도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정부가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일반은행의 주식이 정부에 귀속됐고 한국은행법의 개정으로 은행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사실상 은행의 국유화였다. 이는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에서 자금동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설 은행들도 있었는데 1961년 농업협동조합과 중소기업은행이, 1963년에는 서민 금융지원을 위한 국민은행이 설립됐다. 이어 1967년에는 수출입금융지원을 위한 외환은행과 주택자금 공급을 위한 주택은행이 세워졌다. 지방은행도 1967년 대구은행과 부산은행을 시작으로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기 정부의 정책은 기업이 은행으로부터 보다 쉽게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구체적으로 은행들은 주거래은행제도를 도입해 경제성장효과가 크고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들에게 우대 금리로 대출을 해줬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은행의 자금지원을 바탕으로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은행이 경제발전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금융지원에 힘입어 기업과 한국경제가 도약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저축장려를 홍보하는 한일은행 전경

1960∼70년대 정부와 은행들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것 중 하나는 '저축장려'였다. 성장을 위해서는 투자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원이 필요했지만 당시 저축은 저조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65년 9월 30일 시행된 금융개혁은 은행 정기예금 금리 인상이 주요 내용이었다. 개발 위주 경제 정책 등에 따른 물가 급등으로 실질 예금 금리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시중자금이 실물투자와 사채시장으로 몰리자 이 돈을 다시 은행으로 끌어오기 위한 정부의 결정이었다. 당시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15%에서 연 30%로 대폭 인상됐고 은행들도 적극적으로 신종 예금상품을 내놓으면서 저축장려에 동참했다.1970년대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은행에는 또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된다. 중화학공업은 설비투자 등으로 많은 자금이 투입돼야 하고 회수 기간은 길어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민투자기금이 조성됐고 주요재원으로 국민투자채권이 발행됐다. 또 1974년 한국산업은행법, 한국외환은행법 등을 개정해 기존 특수은행의 설비자금 공급을 확대했다. 또 1976년에는 한국수출입은행을 정식 발족해 중화학공업 제품 위주로 재편된 수출자금 지원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하지만 성장위주 정책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은행부실을 낳았고 1980년대 들어서 낙후된 금융부문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화 정책이 추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유화됐던 은행들은 점차 민영화됐고, 은행 업무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감소하는 동시에 엄격하게 관리되던 금융기관 신규 허가는 완화됐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이전까지는 조흥ㆍ상업ㆍ제일ㆍ한일ㆍ서울신탁은행 등 5개 시중은행과 10개 지방은행이 영업을 했는데 1982년부터 1992년까지 6개의 시중은행이 신설되고 특수은행의 일반은행 전환 등의 과정을 거쳐 1995년 말에는 시중은행이 15개에 달하게 됐다.◆경제위기의 극복과 간판 바꾼 은행=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정부는 금융 규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했고 그 결과 외환 위기 직전 지방은행을 포함한 일반은행 수는 26개까지 늘게 됐다. 하지만 은행 수의 증가는 금융산업에는 오히려 독이 됐다. 옛 대동은행에 근무했던 한 임원은 "당시 좁은 시장에서 은행 수가 급격히 증가하다보니 수익성은 악화됐고 과도한 경쟁으로 부실화가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결국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한 뒤 금융산업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흥ㆍ상업ㆍ제일ㆍ한일ㆍ서울ㆍ외환 등 6대 시중은행을 비롯해 모든 은행들이 모두 모습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우리나라 은행의 역사는 은행 간 합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조흥은행은 강원은행, 충북은행을 합병하고 상업은행은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통합됐다. 제일은행은 해외자본에 인수되고 서울은행도 도이치뱅크 등의 위탁 경영을 거쳐 2002년 하나은행에 인수됐다. 이 밖에도 5개 은행이 퇴출됐고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 하나은행과 보람은행이 합병했다. 이밖에도 신한은행은 동화은행, 주택은행은 대동은행, 한미은행은 경기은행, 하나은행은 충청은행을 각각 인수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주택은행이 국민은행과 합병됐고 평화은행은 한빛은행에 합병된 후 다시 우리은행으로 거듭났다. 이어 2004년 한미은행은 한국씨티은행에 합병되고 조흥은행은 신한은행과 합병했다. 최근에는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이 통합절차를 밟고 있다.이에 따라 외환 위기 이후 살아남은 은행들의 특징은 합병과 외국 자본 유입 등으로 대형화 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금융지주회사의 등장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종합금융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 바탕이 됐다. 방카슈랑스, 인터넷뱅킹, 모바일뱅킹 등 새로운 업무 영역을 개척하는 원동력의 역할도 했다. 금리자유화와 금융시장의 개방으로 이자수익이 감소하고 은행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은행들도 신규 수입원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금융ㆍ외환 위기 이후 대형화와 수익성 다변화 못지않게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도 부각됐다. 또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된 IT의 발전은 은행 업무를 획기적으로 바꿨지만 한편으로는 보안 등 새로운 리스크와 함께 IT기업의 금융업 진출 등 은행의 수익성을 저해시킬 가능성도 함께 키웠다. 구한말 시작된 은행의 역사는 광복 이후 한국전쟁, 경제개발, 외환위기 등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발전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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