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 부활·인권 선언 좌절…부끄러움 모르는 '막장' 한국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아내가 불륜 현장을 목격 당하고도 뻔뻔하게 남편에게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며 항의하고, 따지는 시어머니의 뺨을 때린다. 혈육간 배신ㆍ출생의 비밀은 기본이요, 날마다 주인공급 인물들이 죽어나간다. 사돈끼리 연애를 하거나 며느리 오디션, 납치 자작극 등도 등장한다. 불륜, 동거, 폭행, 폭언 등은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흔하다. 요즘 한국 TV를 장악한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막장 드라마는 이제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막장 드라마화되면서 '요한 계시록'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전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도덕적 일탈들이 막장 드라마를 통해 '정당화'된다. 특히 개인적 일탈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도덕적 일탈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한 복판에서 이같은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사건 두가지가 벌어졌다. 이날 해방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 등 수많은 애국 인사들을 암살ㆍ테러하고, 4.3사건을 통해 2만명이 넘는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 이들은 재건 총회를 개최하면서 보기에도 끔찍한 해골이 그려진 깃발을 게양했다. 또한 서북청년단은 대관을 취소한 서울시청소년수련관 관계자들에게 욕설과 폭언을 하고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수련관 1층 카페를 강제로 점령한 채 총회를 강행했다. 이에 제주도민을 비롯, 시민사회는 허탈ㆍ분노를 표시했다. 제주도민 김모(45)씨는 "아무리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 수준이 몇년새 퇴행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수만명을 학살한 백색테러단체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버젓이 벌건 대낮에 활동하고 다니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50여년 전의 그 끔찍한 사건이 다시 재현되는 거 아닌가 두려울 지경이다. 당국은 이들을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해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서울시청사 내에서 열린 서울시민인권헌장제정시민위원회도 파행으로 마무리됐다. 안전ㆍ복지ㆍ주거ㆍ교육 등 시민이 누려야 할 인권적 가치와 규범을 담은 인권 헌장을 제정하겠다며 각계 각층 인사들로 만들어진 위원회는 표결 끝에 성(性) 소수자 차별 금지 내용을 구체화하는 내용의 문안을 채택하긴 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위원들이 표결 처리를 거부하고 퇴장하는 바람에 재적 과반수를 충족하지 못해 서울시가 거부 입장을 밝히는 등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보편적 인권'보다는 '사회적 합의'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최근 몇개월간 시민위원회가 개최한 공청회ㆍ토론회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인사들의 욕설ㆍ폭언ㆍ폄훼 발언ㆍ회의 진행 방해 등으로 얼룩졌다. 이성ㆍ합리ㆍ민주적 토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성애=악'이라는 단순 공식만 머릿 속에 넣은 이들이 판을 깨고 논의를 제자리도 돌려 버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청회가 무산되고 강남북 토론회가 비정상적으로 개최되는 등 헌장의 일부 미합의 사항에 대한 사회적 논란과 갈등이 확산돼 시민의 삶속에서 헌장의 가치가 공유되고 이를 통해 수용성을 높여야 하는 헌장 제정 목적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에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성소수자 인권 보호는 의사결정 방법을 따지기 이전에 보편적ㆍ일반적 인권, 원칙의 문제로 합의되지 않았다고 인권선언을 채택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라며 "박원순 시장이 이번 조치를 취소하고 성적 소수자 인권 보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힌 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최근 세월호 유가족의 목숨을 건 단식 농성장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일간베스트 일부 회원들, 5.18 희생자 사진을 놓고 '홍어 택배 왔다'고 비아냥댄 사건, 유민 아빠의 단식 농성 도중 온라인에서 배포된 어묵 사진 등 이성과 배려ㆍ대화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사건들이 '일상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인간이 동물과 가장 큰 차이점은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인데,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온갖 도덕적 일탈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상황 논리로 변명하며 정당화시키는 일이 일반화되고 있다"며 "이성과 토론, 합리적 판단,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배려 등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가 자꾸 설 곳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 전체의 반성과 실천, 반이성ㆍ폭력ㆍ반민주주의적 행태에 대한 철저한 격리와 처벌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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