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힘이 넘친다. 술자리에서는 넉넉한 주량과 활기찬 목소리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고, 일을 할 때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술이든 일이든 지치는 걸 보지 못했다. 중간에 나가떨어지는 건 꼭 상대방이다. 밀리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뭔가 꼭 하고 싶은데 주위에서 호응하지 않으면 코에서 김을 내뿜으며 설득하는데, 말이 설득이지 강압이나 강요이기 일쑤다. 크고 작은 마찰이 있을지언정 결국 모든 일이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가기 마련이다. 그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가면 실패가 적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선배, 후배를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 잔머리를 쓰더라도 미리 다 몸으로, 말로, 보여주는 덕에 밉지 않은 것이다.(훤히 다 보이는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타고난 체력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 소탈하고 밝은 성품, 넉넉한 인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던 그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몇 년 전 돌연 대표이사 자리에서 낙마했다. 10년 넘게 애면글면 사업을 일궈 막 궤도에 올려놓았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일로 순식간에 자리를 내놓게 된 것이다. 사퇴에서 끝난 게 아니라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느라 일 년 넘게 고생해야 했다. 그쯤 되면 대개 실의에 빠져 운명을 탓하거나 자포자기하기 십상인데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꿋꿋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큰일을 당하기야 하겠어" 하며 의연했다. 가까스로 혐의는 풀렸지만 실직 상태는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따금 전화해서 식사라도 함께하자고 할라치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들어봤지, 요즘 엄청 바빠서 시간 내기 쉽지 않아" 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들리는 말로는 일자리 잡느라 동분서주하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 함께 저녁 먹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쩐 일일까, 궁금해하면서 약속장소에 갔더니 그 선배가 다시 정장에 넥타이 메고 환하게 웃으며 예의 콧김을 팍팍 내뿜고 있었다. 전에 있던 곳보단 작지만 다시 일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출근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이 일 저 일 할 일이 태산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막걸리가 오갔고 우리 일행은 기분 좋게 왁자지껄 취했다. 취기가 무르익자 그 선배가 불쑥 힘들었던 시절 끄적거린 글이 있다며 낭독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흙탕물을 뒤집어썼다고 꽃이 아니더냐, 내일 내릴 비가 씻어주지 않겠느냐.' 그때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가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선배, 그만하시고 적당히 타협하세요"라고 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치우(恥愚)><ⓒ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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