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본 어떻게 삭제됐나

[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참여정부의 문서관리 시스템인 e지원(e-知園)은 청와대 내 모든 행정업무의 정보처리를 통해 행정의 투명성 및 책임성을 제고하고 업무수행의 모든 과정 및 결과가 기록물로 생산·관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됐다. 기안자나 보고자가 상급자에게 결재·보고를 올리면 문서가 도달할 때까지 처리의견, 수정내용 등 의사결정 과정이 모두 투명히 드러나도록 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모든 문서가 관리·축적돼 철저한 기록화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최종 결재권자인 대통령이 결재를 완료한 문서가 보고라인을 따라 다시 최초 기안자, 보고자에게까지 내려와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하향처리 기능도 담겼고, 기안자나 보고자가 종료 처리를 해야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e지원이 처음 도입될 당시 인사, 감찰 등 일부 기록으로 남기기 부담스러운 문제 등에 대해 청와대 내부에서 사용이 꺼려지기도 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일은 아예 하지 말라”며 시스템 사용을 독려했다고 한다. 청와대 기록관리비서실이 작성한 ‘대통령기록 이관사업 매뉴얼’에 따르면 e지원은 ▲대통령은 개인의 사적행위와 고민이 담긴 것까지 담으려 함 : 좋은 것과 나쁜 것 구별 없이 다 기록해 두어야 함 ▲대통령이 지시한 것은 모두 다 기록해 둘 것 : 기록이 필요할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님. 우리는 기록을 남기고 후세가 판단할 문제임 ▲장관의 발언도 다 기록하게 하여 정책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함 ▲‘자기가 한 일을 또박또박 기록해 두는 것’은 매우 주요. 9급 공무원의 제안도 남겨야 함 등과 같은 원칙에 따라 관리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직접 발명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 특허로 등록된 이 시스템은 개발 취지에 맞게 문서관리카드 등 한번 등록된 문서는 삭제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삭제 기능 자체가 없이 개발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업무 인수인계를 앞두고 e지원에 담긴 문서 가운데 테스트문서, 중복문서, 민감한 문서 등을 두고 고심하던 청와대는 2007년 초 국정상황실장, 총무비서관, 기록관리관, 업무혁신비서관 등으로 ‘기록물 이관 및 인계인수 TF회의’를 꾸렸고, e지원 관리부서인 업무혁신비서관실이 개발·관리업체에 요청해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방법이 적힌 ‘삭제매뉴얼’을 받아 온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본 역시 수정본이 생산된 이후 참여정부 기록물이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을 마치기 전 조명균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의 요청을 받은 업무혁신비서관실이 삭제매뉴얼에 따라 문서관리카드 메인테이블에서 표제부를 삭제해 e지원이 초본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했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삭제 지시로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는 회의록 초본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무단 삭제된 것이라며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장관급)과 조 전 비서관을 대통령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 위반 및 공용전자기록등손상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조 전 비서관의 진술 외에 노 전 대통령의 ‘삭제 지시’에 대해 뚜렷한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회의록 수정본을 보고받은 뒤 “회의록은 국정원에서 1급비밀로 보관하라. e지원에 있는 회의록 파일은 없애도록 하라. 회의록을 청와대에 남겨두지 말라”는 취지로 지시했다고 조 전 비서관이 진술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조 전 비서관은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은 없다. 초안은 보존할 필요가 없으니 삭제조치 해달라고 한 것”이라며 ‘국정원 보내서 1급 비밀로 관리하며 다음 대통령 보도록 해라. 정권교체기에 보안문제 발생하지 않도록 해라. 불필요한 것은 정리를 해라’정도의 지시가 있었을 뿐이라고 반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 전 비서관은 5차례의 검찰 소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초창기 노 전 대통령이 삭제를 지시했다고 진술했지만, 이후 잘못된 진술이므로 이를 번복했는데도 검찰이 해당 진술만 언급한 것은 삭제의 고의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삭제를 지시한 동기에 대해서는 “공판 유지 과정에서라면 몰라도 수사결과 발표에서 평가나 의견개진은 맞지 않다”며 수사결과 공개를 꺼렸다. 그러면서도 “참여정부 관계자들은 구체적인 진술을 피하면서 보안상의 이유로 지시했을 것 같다고만 하는데 보안성이라는 게 결국 보지 못 하게 하라는 것 아닌가, 동기를 추정할 수 있지 않나”라고 말해 의혹을 키웠다. 그간 여당 측은 참여정부가 노 전 대통령의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등 굴욕외교를 감추기 위해 회의록을 폐기하려 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노 전 대통령이 회의록 초본을 열람한 뒤 직접 남긴 보고서의견에는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다듬고, 녹취록만으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각주를 달아서 정확성, 완성도가 높은 대화록으로 정리해 e지원에 올려두시기 바랍니다”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 당초 98페이지 분량이었던 회의록 초본은 국정원이 보관한 정상회담 녹음파일 등을 정확히 반영하고, 단어나 발언자, 호칭·명칭, 말투 등이 수정·보완되면서 5페이지가 늘어 수정본은 103페이지 분량이 됐다. 수사의 발단이 된 ‘NLL 포기·평화지대 선포 발언’은 검찰이 공개한 초본과 수정본에 따르면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것이다. 검찰은 국정원이 보관해 온 회의록의 내용 역시 초본·수정본과 사실상 일치한다고 설명해왔다. 국정원이 실제 녹음내용에 따라 수정한 부분이 반영된 수정본 상의 NLL관련 노 전 대통령이 남긴 발언은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것을 가지고 평화문제, 공동번영의 문제를 다 일거에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기에 필요한 실무협의 계속해 나가면 내가 임기 동안에 NLL문제는 다 치유가 됩니다”이다. 노 전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일 목적으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입법하고, 대통령기록관, e지원 등을 마련한 점, 회의록 수정을 지시한 내역, 다른 정상회담의 경우 초본과 수정본이 모두 대통령기록물로 이관된 점,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원이 1급비밀로 회의록을 등재해 보관·관리해 온 점, 논란이 됐던 NLL포기 발언 등 굴욕외교로 비춰질 요소를 찾기 힘든 점 등에 비춰 굳이 회의록 초본에 대한 삭제를 지시한 동기를 검찰이 법정에서 어떻게 규명할지 관심을 모은다. 정준영 기자 foxfury@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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