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아모 김성동 사장
[아시아경제 최준용 기자]글. 칼럼니스트 이현경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창문을 계속 열어두었는지 선선한 저녁 바람이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고 가방을 소파에 툭 던졌다. 부엌에서 K가 나를 불렀다. 나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K는 냉동실에서 조그만 통을 꺼냈다. 뚜껑을 여니 아이스크림이 가득 차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었다. 반은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하얀 색이었고, 나머지 반은 커피 우유처럼 옅은 황색을 띄고 있었다. 여태껏 그런 색을 띠는 아이스크림은 본적이 없었다. 나는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K를 올려다 보았다.“일단 먹어보라니까.“K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확신이 드는 대상에 대해서는 끝까지 가고 보는 K이기에 나올 수 있는 눈빛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새하얀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자 시원한 느낌이 입안에 퍼졌다. 약간은 시큼하면서도 우유 같은 맛이 녹아있었다. 마치 떠먹는 요구르트를 그대로 얼린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하지만 식감은 훨씬 부드러웠다. 나는 반대편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듬뿍 떠서 입으로 넣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커피와 치즈의 풍미가 동시에 느껴졌다. 느끼하거나 텁텁한 맛은 전혀 없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K를 다시 보았다.“완전 신세계지?”K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면 달고 텁텁한 맛이 입안에 남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 하지만 이런 맛이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어디서 파는 거야?”“파는 거 아니고 이제 팔 거.”나는 K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K는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동료들을 통해 사업 아이템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인 젤라또를 처음 들여온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회사 일을 하며 다양한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다닌 K였지만 정통 젤라또는 그에게도 새로운 맛이었다.“새벽바다 앞에 선 것 같았어.”K는 젤라또를 먹어본 소감에 대해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젤라또의 맛은 새벽 바다에서 부는 찬 바람처럼 깨끗한 느낌이었다. 또한 출항을 알리는 배처럼, 젤라또는 K에게 새로운 그 무엇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부엌 창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더위와 일에 지쳐 열에 들뜬 것 같던 몸이 차분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K를 보고 웃었다.K는 다음날부터 젤라또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원료 배합은 물론 아이스크림 기계에 대한 공부까지 다양한 과정을 배우는 것이었다. 배우는 과정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치껏 보고 따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스스로 시장 조사를 하는 일도 잦았다. K는 마치 매일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신나는 표정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노트에 그날 그 날 새로 알게 된 사실이라든가 앞으로 기억해야 할 것들, 생각나는 전략들을 꼼꼼히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노트는 날이 갈수록 두꺼워졌다. 나는 종종 K가 가져오는 젤라또를 맛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K가 맛에 대해 물으면 느낀 점을 상세히 얘기해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러면 K는 개선점을 노트에 적곤 했다. 그런 하루가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흘렀다.어느 노곤한 저녁에는 맥주를 나눠 마시며 앞으로의 일을 얘기했다. 모든 게 확정된 일은 아니지만 K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K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되는 순간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새삼스레 K의 긍정적인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언젠가 물었던 것처럼, 나는 K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넌 어떻게 그렇게 항상 즐거워?”K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가만히 K의 대답을 기다렸다.“있잖아, 나는 사는 게 정말 즐거워. 내가 매일매일 뭔가를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서 행복을 찾고 있어. 나한테 재미라는 건, 행복이라는 건 그런 거야. 봐봐. 지금도 너랑 나눠 마실 수 있는 차가운 맥주가 있다는 것 때문에 난 참 행복하다.”K는 맥주를 한 번 더 마셨다. 나는 몇 줄씩 쓰다만, 수두룩한 소설의 파편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지금의 행복’이라는 말을 속으로 찬찬히 읊조렸다. 여름밤의 바람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다음의 여름이 오더라도 K와 똑같이 살 순 없었다. 다만, 나도 행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순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맥주로 오른 취기 탓인지,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혹은 싱긋 웃는 K 탓인지 헷갈렸다. 어쨌거나 나는 마음껏 웃고 있었다. K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물결 건너 저편에…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 나는 가사를 가만가만 따라 읊기 시작했다.K는 얼마 후, 사무실을 구했다고 전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일을 진행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젤라또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K가 가져다 준 마지막 젤라또를 먹으며 이 정도라면 분명히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라고 말해줬다. K는 그렇게 되면 나에게 비싼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우스운 농담처럼 낄낄대며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K가 집을 떠난 뒤 나는 무리하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전부 포기했다. ‘지금 참고 견디다 보면 나중에는 행복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괴롭게 실천하던 것들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기로 결정했다. 지금 당장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K처럼.
K의 젤라또 사업은 이전과 다르게 성공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호점을 내고 싶다는 사람이 사무실 오픈 하자마자 찾아왔고, 첫 번째 매장 오픈 직후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지방에서도 매장 오픈을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K가 만든 젤라또 브랜드는 대구에 2호점, 부산에 3호점, 광주에 4호점, 인천에 5호점이 차례로 들어섰다. 모두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덕분에 K는 전국을 돌며 사업을 진행해야 했다. 덕분에 나와 K는 몇 달 만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나는 K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전보다 더 두꺼워진 K의 노트가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재미있지?”나는 K를 바라보며 물었다. K가 싱긋 웃었다. K가 앉아있는 의자 위쪽 창문으로 가을 햇살이 스며들었다. 환한 빛이 K를 지나 나에게도 닿았다.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온기가 차 올랐다. 나는 K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김성동 CEO는 이탈리아식 젤라또 전문 카페 브랜드인 ‘카페 띠아모’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도에 1호점을 오픈한 카페 띠아모는 현재 전국 400여 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으며 필리핀, 중국, 몽골, 캄보디아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다.최준용 기자 cjy@asiae.co.kr<ⓒ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
대중문화부 최준용 기자 cjy@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