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 악성민원 경험한 곳 84.3%
블랙 컨슈머 피해, 대기업보다 중기가 더 심해…자료 공유 등 공동 대응책 마련 필요[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 이정민 기자] #1. 직원 20명 규모의 생활가전업체 대표 A씨는 최근 해외 바이어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수출 상담 중 난데없이 회사에 찾아온 한 고객이 난동을 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 이유를 들어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고객은 홈쇼핑으로 물건을 샀는데 약속한 날이 아닌 다음 날 배송됐다며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감안해 제품 5개를 더 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A씨는 부당한 요구인 것을 알면서도 해외 바이어 앞이어서 소비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2. 미용기기 전문업체 B사는 "제품이 잘못 왔다. 다시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소비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제품 구입 후 정상적으로 수령했는데도 연거푸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재발송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고객은 세 번이나 재발송을 요청하고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모든 회선으로 관련 없는 부서 직원에게 고성과 욕설이 섞인 항의를 하고 있다. B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요청을 들어주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들이 '블랙 컨슈머'에 멍들고 있다. 블랙 컨슈머란 구매제품 사용 후 반품 또는 환불을 요구하거나 보증기간이 지난 제품의 무상수리를 요구하는 등 보상을 목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불량 소비자'를 말한다. 자체 대처 능력이 있는 대기업들에 비해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블랙 컨슈머…대기업보다는 중기가 타격 커=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1987년 8063건이었던 고객 불만건수는 2011년 77만8000건으로 늘었다. 지난 25년간 96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소비자 권리가 향상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격상된 소비자 지위를 악용해 블랙 컨슈머가 난립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2011년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기업 314곳을 조사한 결과 의도적으로 악성민원을 제기하는 블랙 컨슈머를 경험한 기업이 전체의 84.3%에 달했다. 2007년 중소기업중앙회가 조사한 57.5%에 비하면 4년 새 약 30%가 증가한 것.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불만을 잠재우려는 추세다. 블랙 컨슈머로 인해 추가되는 비용은 결국 기업의 제조 원가에 반영되고 이는 일반 소비자의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가기 때문이다. 소수의 블랙 컨슈머 때문에 선량한 소비자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격이다. 그동안 블랙 컨슈머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대기업들이 최근 강경 대응으로 태도를 급선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LG전자와 LG유플러스는 고객이 대리점을 방문해 난동을 부릴 경우 경찰 협조를 받기로 했으며, KT의 자회사인 케이티스는 지난 7월부터 전화상담 업무에 '삼진아웃제'를 도입, 협박이나 폭언을 일삼는 고객에게 최대 법적 대응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대기업들과 사정이 다르다. 고객 불만을 처리하는 인력도 부족하거니와 뜬소문 하나에 회사의 존립이 흔들릴 수 있어 대기업처럼 강경하게 대처하기 힘들다. 블랙 컨슈머들이 노리는 것도 이 부분이다. 생활가전업체 C사는 제품 사용 중 화상을 입었으니 병원비ㆍ정신적 피해액으로 2500만원을 보상하라며, 그러지 않을 경우 언론에 제보하고 인터넷에도 올리겠다고 협박해 온 블랙 컨슈머에 대응하느라 진땀을 뺐다. 회사 관계자는 "우리 잘못이 아니라 고객 과실 탓이 컸지만, 일을 괜히 크게 만들어 구설수에 오를 것이 걱정됐다"며 "타 고객보다 보상금을 좀 더 주는 수준에서 합의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대표 D씨는 "중소기업들은 '일단 막고 보자'는 마음이 강하다"며 "브랜드 이미지로 먹고사는데 불만이나 잡음이 포착되면 바로 매출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합의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대부분은 블랙 컨슈머의 요구를 들어 주는 선에서 합의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4월 소비자의 부당한 요구를 경험한 중소기업 20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3.7%가 소비자의 악성 불만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답했다. '법적 대응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답변은 14.3%였고 '무시한다'는 대답은 2.0%에 불과했다. 부당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로는 대부분의 기업(90%)이 '기업의 이미지 훼손 방지'를 꼽았고 '고소ㆍ고발 등 상황악화 우려(5.3%)' '업무방해를 견디기 어려워서(4.1%)' 등을 우려하는 업체도 있었다. ◆중기 간 정보 공유 필요…중기청도 교육 확대 계획=대한상의가 지난 3월부터 블랙 컨슈머 대응 교육을 진행하는 등 사태 해결에 나서고 있지만 중소기업의 숫자를 생각하면 태부족이다. 이에 따라 블랙 컨슈머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된 중소기업들을 위해 중기중앙회나 업종별 협회 차원의 공동 대응조직 등을 마련하거나 상습범의 블랙리스트를 공유하는 등 좀 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중기 단체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악성 민원에 대응하는 전담팀도 있고 필요하면 법적 소송까지 나서지만 중소기업은 그럴 인력도 조직도 지식도 없다"며 "중소기업을 도와 줄 제도적 장치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수봉 대한상의 조사1본부장은 "기본적으로 개별 기업 차원에서 스스로 블랙 컨슈머에 대한 대응능력과 자세를 키워야 하겠지만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대처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정부나 민간단체 등에서 상습 블랙 컨슈머에 대한 법적 제재를 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주거나 블랙 컨슈머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교류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기청도 블랙컨슈머 관련 교육을 확대하는 등 대응책을 강화할 방침이다. 김문환 중기청 판로정책과장은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들의 피해사례는 직접적으로 겉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중소기업들의 피해 현황 등을 파악해 보고, 중소기업유통센터를 통해 블랙 컨슈머에 대한 인지ㆍ대응교육 등을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이정민 기자 ljm1011@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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