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74)

어쨌거나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이 운학이라는 사내가 한때 윤여사를 좋아해서 쫒아다녔다는 것과 그가 지금 하림을 윤여사의 숨겨둔 애인 정도로 지레 짐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그러자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그를 골려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그럼, 이장님은 아직도 윤여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씀인가요?”그러자 운학이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다.“아, 무슨.....!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지금은 그 여자한테 손톱만한 애정도 없어요. 정말이예요. 정말이고 말고요. 솔직히 말해 암 것도 몰랐던 시절 이야기지요. 이런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 여잔 속물이예요. 속물! 탐욕스런 속물. 알겠소? 장선생이 좋아한다니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소만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젊다면 젊은 나이니까, 내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삼아 하는 말이오만.”그의 말에 하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기라고 윤여사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에겐 천개의 얼굴이 있어, 천개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다 보아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 속엔 제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한두 번 본 사이임에랴.“내겐 그 여자보다 백배나 천배나 착한 마음을 지닌 진짜 천사 같은 여자가 있어요. 그런 여자완 비교도 안 되는 고상한 인격을 지닌 여성이 말이오.”그는 무언가 자랑처럼 늘어놓고 싶어하다가 아차, 싶었던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조용하게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여기 살구골은 예전에 바깥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았던 평화로운 마을이었어요. 내가 군대 가기 전에만 해도 아주 조용한, 우리나라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마을이었소.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마을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말았어요. 마치 몸 안에 독이 스며들 듯이 땅 투기꾼에, 실패한 인생들까지 들어오면서 흉흉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던 거요. 어디에서 굴러먹었던지 알 수 없는 음습하고 광기 어린 작가들도 나타나고....” 그리고나서 운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얼마 전에는 개들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연쇄적으로 죽어나가는 일까지 벌어졌어요.”“예.....?”운학의 말에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을 하였다.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다고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고, 듣고 싶었던 내용이었는데 운학이 스스로 말문을 열어주었으니 뜻밖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투다다다 끼익, 하며 마당으로 오토바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제길, 이제야 왔나 보군.” 운학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 쪽으로 가며 말했다. 하림은 창문 너머로 누가 왔나 하고 한번 쳐다보고는 곧 운학을 따라 마당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방금 오토바이에서 내린 사내가 헬멧을 벗고, 오토바이 꽁지에 달린 상자에서 도구를 꺼내고 있었다. 운학 이장과 비슷한 또래의, 염소 수염을 한 사십대 아저씨였다. “벨브가 얼어터졌는가벼.”운학이 아는 체하고 말했다. 하지만 염소 수염 사내는 아무 대꾸도 없이 열어놓은 맨홀 안으로 허리를 굽혀 펜치로 여기저기 두드려보고 나사를 풀어 보더니,“갈아야겠구먼. 벨브만 아니고 펌프 이음매가 터져버렸어. 겨우내 물을 뽑아두어야 하는데 말이여.”하고 사돈 남 말 하듯이 말했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김영현 기자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