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46

“하림아, 고마워.”혜경이 하림의 겨드랑에 머리를 묻고 가만히 말했다.“나, 사실 그날, 우리 초등학교 동창회 하던 날 말이야, 영숙이한테서 네가 온다는 이야길 듣고, 널 보고 싶어서 갔다.”“난 준호한테서 네가 온다는 이야길 들었는데....?”“후후. 그랬나? 이제보니 고것들이 작전을 짰던 것이었네.”영숙이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림이한테는 준호가, 혜경이 한테는 영숙이가 전화를 해서 둘이 만나라고 나름 다리를 놓아준 것이었다. “암튼 그날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떨어져있는 옛날 교정 뒤에서 널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내가 가만히 널 뒤에서 따라 가던 것 기억 나?”“응. 멀리서 보았지만 난 단번에 넌 줄 알았지.”“미안해.”“뭐가....?”“그냥.”하림은 팔을 오무려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우리 결혼하자.”“싫어.”“왜?”“그냥.”“그런게 어디 있어? 말끝마다 그냥, 그냥이잖아?”하림이 짐짓 화난 목소리로 투정이라도 부리듯 말했다.“사실 나도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 너랑 은하 같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말이야. 아까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그런데....?”“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아니야. 하림이 넌 멀쩡한 여자 만나 멀쩡한 결혼을 하면 좋겠어.”“피이, 그럼 넌 멀쩡한 여자가 아니야?”하림이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난 한번 결혼했으니 숙제 끝난 셈이지.”혜경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곰곰이 생각해보니 한번이면 족하겠더라. 남자랑 한 지붕 한 이불 밑에서 살림 살면서 아이 낳고 아웅다웅거리는 것 말이야. 너랑 결혼해서 산다고 뭐가 달라지겠니?”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특별히 달라질 거야 없겠지. 그렇다고 달리 할 것도 없잖아?”하림이 별 대책없이 내뱉었다.“넌 결혼 안 해 봐서 몰라. 폭풍 같은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일상적인 삶이란 놈이 기다리고 있지. 그게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아니야. 한번 해봤으니까. 그리고 은하 하나 키우기도 내겐 벅차. 친구들 이야기로는 딸은 자신의 운명과 같아서 평생 따라다니는 거래. 너랑 결혼하면 또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난 그럴 자신이 없어. 이렇게 나의 생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도 들고....”혜경의 목소리에 어둠이 깔렸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하림이라고 무슨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무거운 돌멩이 하나가 가슴에 얹히는 것 같았다.“미장원 말고, 뭘 하고 싶은 게 있어?”조금 있다가 하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몰라. 하지만....”혜경이 말끝을 흐렸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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