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우 銅 구하기', 숨막혔던 1시간의 재구성

[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한국어를 모를 리도 없고, 포스터에 적힌 말의 의미도 몰랐을 리 없다. 당신이 한 행동이 어떤 뜻인지 알고 하지 않았나?"숨 막혔던 1시간이었다. 날선 질문과 냉혹한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4년을 길러왔던 수염까지 깎으며 의지를 다졌지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달리 없었다. 그저 진심과 겸손함을 담아 성실한 답변을 이어갈 뿐이었다. 철저한 준비 덕에 얼음장 같던 분위기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녹아내렸다. 오해도 이해로 자연스레 바뀌었다. 결국 '박종우 동메달 구하기'는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다. 11일(이하 현지시간) 스위스 로잔 팰리스호텔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안건은 박종우의 2012런던올림픽 남자축구 일본과의 3·4위전 '독도 세리머니.' 경기 내 어떤 정치적 선전도 금지한다는 올림픽 헌장에 반하는 행동이었다.최악의 경우 동메달이 박탈될 수도 있는 상황. 박종우는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 제프리 존스 국제변호사 등과 함께 차분한 마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세 명으로 구성된 징계위원회가 그들과 마주 앉았다. 토마스 바흐(독일) IOC부위원장, 세르미앙 응(중국) 부위원장, 엘무타와 켈리(모로코) 위원 등 모두 차기 IOC 위원장의 유력 후보였다. 박종우 측은 불안했지만 내심 자신이 있었다. 하루 전 수십 개의 예상 문답을 숙지하고 리허설까지 치른 까닭이다. 특히 존스 변호사는 '기선 제압'으로 내놓을 프레젠테이션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예상은 빗나갔다. 선수를 친 건 징계위원회. 방대한 양의 영상과 사진을 먼저 펼쳐 놓았다. 모두 경기 당일 박종우의 독도 세리머니 과정을 담고 있었다. 이내 따지는 듯 한 뉘앙스의 질문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분명 선수 본인이 스스로 한일 아닌가?""정치적 행위 금지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지 않았는가?""그 순간에 왜,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미로 그런 행동을 했는가?"뒤이어 가장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 비수를 꽂았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모를 리도 없고, 포스터 적힌 말의 의미도 몰랐을 리 없다. 당신이 한 행동이 어떤 뜻인지 알고 하지 않았는가?"
박종우는 진심으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깔끔하게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진정성을 담아 성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이후 빗발친 질문은 모두 예상했던 것들이었다. 술술 이어지는 답변에 징계위원회 위원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윽고 박종우는 그들의 색안경을 벗기는 한 마디를 던졌다. "전 정치 활동가가 아닙니다. 그저 지난 15년 동안 축구 밖에 모르고, 축구만 해 온 축구 선수입니다."여기에 하나의 자료가 더해졌다. 박종우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앉아있던 일본 선수를 위로하는 장면이었다. '독도 세리머니'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계획적으로 일어난 행동이 아닌, 현장 분위기에서 나온 애국심의 발로이자 우발적 행위였음을 반증하는 근거였다. 대한체육회도 힘을 보탰다. 정치적 행위 금지에 대한 사전교육을 미처 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고, 선수 본인에겐 잘못이 없음을 강조했다. 30~40분 정도 소요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회의는 1시간 동안 진행됐다. 자리를 빠져 나오던 존스 변호사는 '제대로 준비 안했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라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종우도 몰려드는 취재진에게 "성실히 조사에 임했다"라며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낭보가 날아들었다. 징계위원회의 소견을 받은 IOC 집행위원회는 박종우에게 엄중 경고를 내리는 한편 대한체육회에게 올림픽 헌장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대신 박종우에게 '잃어버린 동메달'을 돌려주기로 했다. 오랜 시간 숨죽이며 간절히 기다려왔던 탓일까. 박종우는 "기쁨보다 어리둥절함을 먼저 느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집 한 켠 장식장에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 떠올랐다"라고 했다. 올림픽 메달을 놓아둘 자리. 여백은 보기 좋게 메워졌다. 박종우는 이제 당당한 한국 축구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다.전성호 기자 spree8@정재훈 사진기자 roz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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