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패션왕>에서는 오히려 어색하고 뻣뻣하다는 반응이 많았다.이제훈: 그렇더라. 나도 모니터를 하니까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월한 지위를 보여주는 게 보통 멋있거나 환상을 가질 수 있는 방식이기 쉬운데 재혁은 억눌려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거나 독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뉴스에서 재벌들이 검찰에 출두하거나 하는 걸 자세히 봤는데 ‘어, 독특하네?’ 싶더라. 컨퍼런스나 파티 같은 데서 보여주는 나이 드신 분들의 모습도 반영할 수 있었고. 그런데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는 못 한 것 같다. 그래서 빨리 바꿨지. (웃음) 검찰 출두 같은 건 특수한 상황이라 평소보다 경직되었을 텐데 그걸 참고하다니. (웃음)이제훈: 그런 걸 너무 봤나? (웃음) 너무 많은 설정이나 생각을 집어넣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부분도 조금씩 덜어지는 게 보였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고. <H3>“아직도 연기에 목이 말라있는 것 같다”</H3>
드라마는 완결된 시나리오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작은 모티브 하나만 주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재혁을 선택한 건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기 때문인가?이제훈: 인물에 대한 소개를 봤을 때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서 그려졌던 가진 자, 흔히 얘기하는 재벌 2세나 백마 탄 왕자처럼 보이기 쉬운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단순한 이미지로서 부각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한 건 빤히 봐 왔던 모습에서 조금 벗어나고자 한 욕심도 있었고 나라면 다른 요소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외형적인 모습이 부각될 수 있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차가움보다 깊은 내면의 뜨겁게 타오르는 질투일 수도 욕망일 수도 있는 감정을 가진 인물로 깊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드라마는 너무 어렵거나 독특하면 시청자가 함께 가지 못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패션왕>을 보는 게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혁을 보고 싶어서 놓지 못 한 시청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재혁에게 설득된 것일까, 그를 연민한 걸까?이제훈: 많이 가졌고 원하는 것을 항상 이뤄냈던 사람이 그러지 못 했을 때의 모습을 매 상황마다 밀도 있게 그려내려고 했다. 사실 재혁은 처음에는 호감 가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싶지. 거침없고 배려 없고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인데 갑자기 가영과 영걸이 자신의 인생에 나타나서 돈을 요구한다던지 학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니까 본인도 당황한 거지. 그런 와중에 일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가져가고 싶어 하는데 그게 안 돼서 많이 괴로워하고 힘들어가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지 않으셨나 싶다. 하지만 그런 걸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는 사람에게 설득시켜야 한다고 전제하지는 않는 편인가?이제훈: 전제한다. 그래야 내가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는 것 같다. <패션왕>을 촬영하면서 재혁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안나가 영걸과 외박한 사실을 알고 안나 사무실로 가서 어제 어디 있었냐고 했던 장면이었는데 그 때 재혁이 해야 하는 게 거울을 보고 있는 안나의 뒤통수를 확 치면서 미는 거였다. 그 상황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거다. 너무 괴로워서 촬영을 한 시간 정도 지연했다. 정재혁으로서 가능할 수 있겠지만 이제훈으로서 연기를 하기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다. 한편으로는 또 되게 하고 싶기도 하고. 결국 손을 잡아채서 거울까지 밀고 들어가는 설정으로 좀 바꿨다. 그게 나도 설득이 되고 보는 사람도 설득될 선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배우는 감독이나 작가의 세계를 받아서 연기하는 사람이니까 납득할 수 있는 선까지 바꾸는 게 늘 보장되는 건 아닐 텐데.이제훈: 그래서 <패션왕>에서의 경험이 정말 힘들었고 배우로서 위기라고 느낄 만큼 심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기 하느냐도 되게 중요했고 특히 드라마는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으니까 이 상황의 흐름을 시청자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스스로 많이 달래기도 하고 받아들이려고 애썼던 것 같다. 배우로서 위기를 느낄 만큼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 덕에 더 많은 대중에게 당신을 알리기도 했다. 짧은 시간 사이에 독립영화의 원석, 한국 영화의 기대주를 거쳐 이제는 스타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다.이제훈: 스스로는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항상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분명 이런 변화와 시선과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있고 그래서 감사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대단한 일을 했어,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야’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스타가 되는 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배우가 스타성을 가지는 게 중요할 수도 있는데. 이제훈: 그것의 시작이 언제나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한 작품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고 해서 그게 영원할 수는 없고 계속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야 지속되는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반짝 스타거나 혹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아끼고 숨기고 작품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보여주려고 하게 되는데 그게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패션쇼에 가거나 광고를 찍거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작품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게 첫 번째다. 끊임없이 작품을 하고 지속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나중에 뒤를 돌아봤을 때 ‘참 열심히 내 일을 사랑하고 살았구나’ 라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해야 할 많은 것들 중 지금 이 시점에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이제훈: 아직도 연기에 목이 말라있는 것 같다. 분명히 좋은 작품을 만나서 사랑을 받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 더 뛰어야 한다,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나중에는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같이 만들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다. <H3>“정직함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다”</H3>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 같은 다른 영역도 포함되는 의미인가?이제훈: 제작이 될 수도 있고 연출일 수도 있는데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 서슴없이 놀 수 있는 환경을 꿈꿔 본다. 그래서 촬영장을 즐기는 것 같다. 연기에 집중하고 몰두하는 시간도 분명 필요한데 직접 카메라를 잡고 촬영을 해본다거나 조명을 맞춰서 상대방 배우가 예쁘게 나올 수 있게 해준다거나 마이크를 직접 대 본다거나 하는 게 되게 즐겁더라. 완전체 영화인이네. (웃음)이제훈: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다. 이게 뭐예요? 저게 뭐예요? 하고 자주 묻는다. 기술적인 부분까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요소들이 다 중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더욱 연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한 컷 한 컷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금 어느 정도 구체적인 형태로 있나?이제훈: 그렇지는 않다. 다만 드라마를 찍으면서 사이즈가 규격화되어 있고 보여야 하는 모습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중에 만약 드라마를 제작하게 된다면 카메라 감독이 핸드 헬드로 인물을 따라가면서 촬영을 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파수꾼>의 방식과도 닮아 있지만 고정된 모습이 아닌 정해진 부분에서 탈피하는 이야기나 그림을 드라마로 보여줄 수 있다면 신선한 도전일 수 있겠다 싶어서 생각하면서 막 흥분되기도 하고. (웃음) 인터뷰에서 <무한도전>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했던데 어떤 멤버를 가장 좋아하나?이제훈: 다 좋아하는데 박명수 씨를 가장 선호하는 것 같다. 그렇게 거침없이 지르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인가? 이제훈: 그런가? (웃음) 논리에 맞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는 게 되게 대단한 것 같다. 얼토당토않은 건데 그게 정말 웃긴 게 그 분의 놀라운 재능인 것 같다. 분명한 목적이나 캐릭터가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만 개인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소극적인 느낌이다. 수줍어하는 건가, 감추고 싶은 건가?이제훈: 어... 감추고 싶다기보다 드러내는 데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음... 그렇다. 그게 나한테는 재미없는 일이다. 다만 이런 인터뷰뿐만 아니라 연기를 포함해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모두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들이다. 물론 나도 과거에는 계속 현실에 타협하고 누구나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답을 억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걸 해야 살아가는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의 조언들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서 별로 개의치도 않고 후회도 없다. 대중의 한 사람으로 배우 이제훈에게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끝까지 모르겠다’인 것 같다. 맡은 캐릭터들도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애매모호함이 있어서 동조하거나 맹목적으로 좋아할 수 없지만 미워할 수도 없었다.이제훈: 나도 날 잘 모르겠다.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 같다. 매 순간 경험되어지는 느낌이 다르고 그런 기억들을 저장해두려고 하고 그게 연기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하겠어? 라는 답을 요구할 때는 스스로 망설이게 되는 것 같다. 정말 그 상황이 되어야지 경험되는 게 있을 테니까. 연기할 때도 대본을 읽고 ‘이렇게 연기해야지, 이런 모습이면 정답이겠다’ 라고 예상을 하지만 막상 할 때는 달라지는 게 수두룩한데 그게 연기를 하는 이유이자 굉장히 큰 즐거움인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일지 예상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이것만은 지키겠다거나 이렇게 되는 것만은 피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나?이제훈: 뭐지? (웃음) (한참 고민하다) 정직한 것. 남을 속이지 않는 게 내게는 되게 중요한 것 같다. 매번 할 수 있는 선에서 표현하는 솔직함이 상대방한테 불편함을 주거나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많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확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예전에는 정말 하고 싶어서 오디션을 보러간 건데 최근에는 제안을 거절해야 할 때도 있다. 기회를 주신 것이 감사하니까 거절하는 것도 더욱 어렵게 느껴지더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나의 진심을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답은 남을 속이지 않는 정직함인 것 같다. 그걸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인터뷰. 김희주 기자 fifteen@10 아시아 인터뷰. 이지혜 seven@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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