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18>조선 토목업, 고난으로 시작하다-경부철도 사업, 10개 회사 참여-처음엔 한일 공존 관계 유지했지만-러일전쟁 눈앞에 둔 일제-수탈과 침략의 도구로 써먹어
▲부산 초량에서 열린 경부철도 개통식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한강은 지금보다 강폭이 두 배 가량 더 넓었다. 지금의 용산역 가까이 서해의 조수가 올라와 지방의 어염선이며 숯을 싣고 온 시탄선, 세곡선 등이 무시로 들어왔었다.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용산에 운하를 뚫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돌았다. 실제로 태종 때엔 좌의정 하륜 등이 용산 운하를 주청하고 나서기도 했다. 용산까지 들어오는 세곡선이 남대문 앞까지 올라와 하역할 수 있도록, 지금의 원효로를 따라 흐르고 있는 욱천(旭川)을 1만명 가량의 군사와 백성을 동원해 준설·확장, 운하를 만들자고 요청한 것이다.오늘날 욱천은 모두 복개돼 큰 도로로 사용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당시 욱천은 제법 큰 하천으로 그 주위는 모두 저습지였다. 여름철 홍수가 나면 물이 남대문 근처까지 범람하고는 했다고 한다.태종은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여 용산 운하 계획을 대신들의 공론에 부쳤다. 헌데 일부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용산도 도성에서 가까운 곳인데 굳이 그곳의 백성을 괴롭힐 필요가 있겠느냐며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만일 이때 용산 운하가 성사됐더라면 개경에서 한성으로의 천도 이후 대규모 토목건설 공사가 될 뻔했다.그 다음 대규모 토목건설 공사는 정조 때 수원 화성의 축성(1794~1796)을 들 수 있다. 성벽의 둘레만 5744m에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공심돈 3개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는 18세기 최대의 건축물이다.하지만 무산되고 만 용산 운하도, 수원 화성의 축성도 모두가 공역이었다. 국가가 백성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한 부역으로 이뤄진 대규모 토목건설 공사였던 셈이다.그러나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부설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의 철도 공사는 그 성격부터가 달랐다. 처음으로 사역의 성격을 띤 대규모 토목건설 공사였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또한 적극적이었다. 비록 근대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기업 형태를 띤 토목건설 회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그것은 당시 철도부설 공사가 발기와 청부로 엄격히 이원화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부철도와 경의철도의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의 철도건설은 발기회사가 철도건설 계획과 노선의 선정 및 철도용지 확보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토목건설 청부회사가 철도건설 공사를 담당하는 형식으로 업무를 구분시켜 놓고 있었다. 때문에 현장에서 근로자들을 직접 사역해 교량을 건설하고 터널을 뚫으며 레일을 건설하는 등 철도건설 공사를 실제로 수행했던 것은 순전히 발기회사와 청부 계약을 맺은 일본과 한국의 토목건설 회사들이었다.
▲일본이 철도부설을 위해 조선과 맺은 조약서
물론 일본의 철도 발기회사 또한 각 공정을 수주해 시공해 나갈 수 있는 청부회사를 선정하는데 따른 원칙이 없지 않았다. 청부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자본과 경험 및 기술의 적합성 여부 다시 말해 할당된 공사를 책임지고 완공해 낼 수 있는 역량과 신뢰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해도 철도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건설된다는 특수성은 일본에게 골머리였다. 단순히 청부회사의 자본과 경험 및 기술만을 기계적으로 고려해 일본 토목건설 회사들에만 일방적으로 선정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철도건설 공사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로부터 방대한 면적의 철도 용지와 수많은 근로자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를 위해서라도 한국인들의 적대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게 급선무였다.이런 분위기 속에 철도건설 붐을 타고 한국에서도 다수의 토목건설 회사가 설립돼 어떻게든 철도건설 공사에 참여하려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한국 토목건설 회사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와 철도건설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철도건설이 한일 양국의 합동사업이라고 교묘하게 선전한 술책에 현혹돼 촉발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어쨌든 철도건설 공사의 수주 활동에 가장 먼저 뛰어든 한국 토목건설회사는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출신의 초대사장 이병승이 1899년에 설립한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였다. 이 회사는 설립과 함께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 측과 철도 건설에 필요한 각종 물품 구매와 근로자를 모집해 공급한다는 일종의 청부 계약을 맺었다.이 청부 계약이 체결된 후 대한국내철도용달은 신문에 광고를 게재했다. 신문 광고에 의하면 이 회사가 일본 철도회사에 납품하려고 한 각종 물품은 목재, 석재, 석탄, 연와석(煉瓦石), 칡, 삼베, 동아줄, 짚신, 잎담배, 미곡, 곡류, 음식 따위였다. 그런가하면 철도 공사에 필요한 석탄을 확보하기 위해 함경도 지역의 탄광을 합병하기도 했다.하지만 이후 영업 체제를 확충 정비하기 위해 사장을 궁내부 대신이자 왕족인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으로 바꾸면서 한성-원산-경흥을 연결하는 경원철도 건설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인 측량 기사를 고용해 2달여 동안 한성에서 양주군에 이르는 노선 예정지를 측량하기도 했다.그러나 자본의 부족으로 측량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이 회사가 경원철도의 건설권을 인하 받을 당시 궁내부에서 주기로 한 거금이 무산되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고 만 것이다.결국 이 회사는 경원철도 건설 계획을 중도에서 접은 뒤 설립 당시 표방했던 철도공사에 필요한 각종 물품 구매와 근로자를 모집해 공급하는 청부회사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첫 철도 공사인 노량진-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철도 공사의 일부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대한국내철도용달과 함께 이 무렵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또 하나의 토목건설 회사는 '대한경부철도역부회사'였다. 고위 관료의 영향력을 이용해 설립 허가를 받은 일종의 관변회사였던 이 회사는 자본 모금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나 실현이 없었다. 그것은 이 회사가 초기 토목건설 회사의 속성대로 단순히 근로자들을 모집해 공급하는 일종의 인력 청부회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밖에도 철도건설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뛰어든 군소 청부회사들이 여럿이었다. 이재순이 설립한 '철도목석등물용달회사', 김재정의 '흥업회사', 정기봉의 '한성철도역부회사', '경성토목회사', '경성북제특허회사' 등이 그것이다.지방에서도 생겨났다. 부산 동래부사 현명운이 경부철도 공사를 청부받기 위해 세운 '부산토목합자회사'를 비롯해 '한일공업조', '경부철도경상회사' 등이 그것이다.이 같이 서울과 지방에서 속속 등장하게 된 토목건설 회사들은 사실 철도 기공을 앞두고 급조돼 거품처럼 등장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사회적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해 있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예컨대 토목건설 회사 설립 붐과 때를 같이 해 각종 철도학교가 세워지면서 서구식 토목건설 기술을 습득한 졸업생들이 다수 배출하고 있었다. 1900년에 개교한 사립 철도학교는 1년 만에 15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낙영학교에서도 철도학과를 특설해 철도기사를 양성했다. 흥화학교의 양지(量地)과에서는 한해에 23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그러나 한국 토목건설업계의 적극적인 참여는 일본 경부철도(주)에게 반가울 리 없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일관된 정책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철도건설업계가 깊은 불황에 빠져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 같은 움직임은 경부철도 건설에 기대를 걸고 있던 일본 철도건설업계의 이익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일본 경부철도가 철도건설 공사를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공사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자국 철도건설업계의 욕구를 만류하면서 한국 토목건설 회사들의 공사 참여를 묵인할 수밖에 없는 고육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때문에 일본 철도건설업계는 한국 토목건설사가 행하는 공사를 예의주시하면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공사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방법은 자본의 부족과 기술의 미숙이라는 한국 토목건설업계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철도공사가 시작되자마자 일본 철도건설업계는 한국 토목건설회사에 얼마 되지 않은 수수료를 지불하거나 합자의 명목으로 그들의 명의를 간단히 손에 쥘 수 있게 됐다. 일본 철도건설사들은 이를 통해 경부철도와 계약을 맺고 공사에 참여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토목건설 회사들은 공존 관계가 유지되는 듯했다.하지만 이 같은 공존 관계는 경부철도가 기공된 지 1년여가 지난 시점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일본 토목건설회사들이 깊은 불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앞다퉈 경부철도 공사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철도건설 공사를 일본이 독자적으로 추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이쯤 되자 한국 토목건설 회사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각 회사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일본 측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곧바로 집단적인 저항에 들어갔다.그러자 공사 진척에 차질을 빚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본은 한국 토목건설회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계책을 내놨다. 한일 토목건설사들이 모두 참여하는 초대형 청부회사인 '한국특허회사'를 설립하는 안이었다.하지만 정부의 매판적 고위관리와 그에 종속되어 있는 일부 청부회사를 제외한 한국 토목건설 회사 대부분은 특허회사에 참여치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 한국 토목건설 회사들은 단결해 공사 청부를 미끼로 접근하는 일본의 회유공작을 거부하고 철도 사역에 일체 불참키로 한 것이다.그러나 칼을 쥔 측은 일본이었다. 더욱이 러일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전쟁에 앞서 경부ㆍ경의ㆍ삼마철도를 건설해 러시아의 함포사격으로부터 안전한 병참간선을 확보하는 일이 최대 급선무였던 일본은 경부철도를 신속히 건설하라는 비상조치를 단행한다.이와 함께 철도건설 공사를 일본의 9개 철도건설 회사에 분할해 담당토록 했다. 경부철도는 전시하의 신속한 공사라는 비상조치를 교묘하게 이용해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됐던 한국 토목건설 회사들을 공사 현장에서 일거에 배제했다.나아가 일본은 한국 정부에 방대한 철도용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경부 및 경의철도의 선로용지는 폭 18m로, 정거장 1개소의 평균 면적은 경부철도의 경우 9만9173㎡(약 3만평), 경의철도는 33만578㎡(10만평)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간선으로 경부철도와 경의철도를 건설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철도용지를 무자비한 폭력을 앞세워 무상 혹은 그에 가까운 헐값으로 탈점했다.저항이 없을 리 만무했다. 일례로 지금의 서울역이 들어선 남대문 근처의 사유지 3만9434㎡(1만1929평)과 민간인 가옥 2346채, 분묘 1000여 기를 철도용지로 수용하면서 집단으로 시위가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또 일본은 연인원 수천만 명에 달하는 연선 주민들을 철도 근로자로 동원해 살인적인 노역을 강요했다. 한국 정부의 주권이 철저히 무시된 채 일본의 토목건설 회사 또는 철도대대, 공병대대의 노동조직이 한국인 근로자를 폭력적으로 지휘 감독하는 방식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단 하루라도 공사를 빨리 완공하려고 혈안이 돼 살인조차 서슴지 않았다.그 뿐 아니라 일본인 철도근로자들의 행패까지 이어졌다. 부녀자를 겁탈하고 양민을 살해하며 비협조적인 지방 군수들을 구타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일례로 1903년 경북 청도에서 일본인 철도근로자가 민가에 난입해 부녀를 겁탈하려다 남편이 제지하자 권총을 쏘아 허벅지를 관통시키고 15세 된 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결국 한국인들은 철도를 문명의 이기가 아닌 일본의 침략과 수탈의 도구로 받아들이게 됐다.이렇듯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1000km의 경부·경의철도는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수난과 희생 위에 구축될 수 있었다. 일본은 우리의 철도 자력건설 운동을 짓밟으면서 일본군의 군용철도로 만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앞서 애기한대로 경부철도의 기공과 더불어 청부회사로서 공사에 참여한 한국의 토목건설 회사는 모두 10여 개에 달했다. 물론 이들 토목건설 회사들은 불과 2년여 간의 짧은 활동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만큼 이들의 청부 내용이나 활동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하더라도 초기 철도공사 현장에 참여했던 이때의 경험과 학습은 분명 우리 토목업의 귀중한 씨앗이 됐음은 분명한 사실이다.작가 박상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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