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왕> vs <패션왕>│아직은 미지근한 청춘의 용광로

SBS <패션왕>에서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패션왕>은 이선미, 김기호 작가의 극본이라는 태생뿐 아니라, 주인공들의 사각관계 멜로나 자본이 만든 계급 차이로 인한 갈등구조 등에서 <발리에서 생긴 일>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러나 <발리에서 생긴 일>의 인물들이 서로를 지독히 원하고, 자신의 결핍을 채우길 뜨겁게 욕망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패션왕>의 영걸(유아인)과 가영(신세경), 재혁(이제훈)과 안나(권유리)는 드라마가 중반을 지난 지금에도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갈팡질팡 하고 있는지 모호하다. 이번 주 ‘TV vs TV’에서 이가온 기자는 <패션왕>이 2% 부족한 이유를, 김선영 TV평론가는 그럼에도 <패션왕>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놓았다. /편집자주<div class="blockquote">패션은 1990년대 트렌디드라마 전성시대에서 주로 주인공들의 자아성취와 꿈의 무대였다. 그리고 그 시기 대표작 MBC <별은 내 가슴에>, SBS <토마토> 등에서처럼 그 무대는 늘 신데렐라 판타지와도 같은 화려한 성공기로 완성되곤 했다. 하지만 <패션왕>에서 패션은 더 이상 꿈의 무대가 아닌 무한경쟁과 서바이벌의 무대다. 드라마 속 세계는 이상과 열정만으로는 역전이 불가능한 계급사회현실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인물들은 이전보다 한층 처절해진 생존기에 몰두한다. <H3>짝퉁과 명품의 모호한 경계</H3>
부착된 상표에 따라 ‘급’이 구분되는 패션처럼 이 작품 속 인물들도 철저한 위계적 계급구조에 속해있다. 영걸(유아인)과 가영(신세경)이 속한 동대문은 패션으로 따지면 짝퉁에 해당하는 세계로, 그 계급 구조의 최하단에 위치한다. 그들은 패션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없기에 “하루하루 벌어서 근근이 먹고” 살기에도 버겁다. 그리고 이들의 위에는 국내 굴지의 의류기업 ‘제이패션’이 상징하는 “하이퀄리티 패션”의 세계가 있다. ‘갑’으로서 그 세계가 지닌 막강한 힘은 ‘영영어패럴’에 대한 하청 계약이나, 자금줄을 한 번에 끊어버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9회에서 영걸과 가영의 이코노미석과 재혁(이제훈)의 일등석이 뚜렷이 대조되던 비행기 신은 그 철저히 양극화된 계급구조를 한 눈에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패션왕>이 그 계급구조의 견고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함께 지적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자주 짝퉁과 명품의 경계를 흐려 버린다. 가령 짝퉁 제조 전문이던 영걸은 뉴욕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이클 제이의 작품을 변형한 옷을 팔다가 오히려 그의 눈에 띄어 콜라보레이션까지 진행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재혁은 태생이 명품인 척 짝퉁 인생 영걸을 무시하지만, 실상은 ‘제이패션’도 해외 명품과의 협업을 통해 “거꾸로 국내에 들어오면 명품 브랜드로 포장”되는 전략을 사용하려는 또 하나의 짝퉁일 뿐이다. 특히 재혁이 가영의 디자인을 안나(권유리)의 이름으로 출시한 뒤, 그 의상의 상표 자리에 가영의 이름을 부착해 선물하는 장면에서 그 짝퉁과 진짜의 구도는 완전히 역전된다. <H3>생존의 서사로 대체되는 멜로</H3>계급구조의 견고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경계를 교란하는 전략의 긴장 속에서 인물들의 생존기는 더욱 치열해지고 종종 비열해지기까지 한다. 영걸은 재혁과 하청 계약을 한 상태에서 같은 제품을 다른 거래처에 납품하는 이중 계약도 서슴지 않고, 이에 대해 재혁은 오히려 그와 가영을 디자인 도용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며 위기를 벗어난다. 이러한 독한 생존전략은 이 작품의 멜로 구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네 남녀가 서로를 번갈아가며 이용하고 배신하며 떠 보고 다시 손을 잡는 복잡한 관계의 사슬을 그린다. 가령 영걸에게 가영은 연민의 대상인 동시에 “돈 벌어주는 여직원”이고, 안나에 대한 관심에는 이성적 호감과 명품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그녀가 재혁의 여자라는 사실이 작용하고 있다. 가영에 대한 재혁의 감정에도 사랑과 그녀의 재능을 이용해 후계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리고 영걸에 대한 질투와 복수심리가 혼재한다. 영걸과 재혁이 각각 안나와 가영에게 기습 키스하는 장면은 마치 서로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상대방의 공간으로 찾아가서 진행된다.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서라도 그를 이기고 최후의 승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사랑마저 생존의 서사로 대체한다. 이처럼 <패션왕>의 강화된 서바이벌 내러티브는 작가들이 전작 <발리에서 생긴 일>을 통해 계급사회현실의 모순을 지적했을 때보다 그것이 더 심화된 현재의 풍속도를 보여준다. 비록 내러티브 완성도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패션왕>이 그리는 뒤틀리고 우울한 청춘들의 모습에 이 시대 청춘의 자화상 일부가 반영된 것만은 분명하다.글 김선영
<div class="blockquote"><패션왕>을 보며 8년 전 같은 제작진이 만든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이 명백한 자기복제이기 때문이다. 잘난 아버지 덕에 부와 권력을 누린 남자(재혁), 실력은 뛰어나지만 배경이 가난한 남자(영걸), 재벌 후계자와 결혼을 약속한 여자(안나), 재벌 후계자가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가영)라는 인물구도는 물론, 사랑과 계급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얽힌 이 멜로드라마는 <발리에서 생긴 일>의 2012년 버전 같다. 그러나 극 중 인물들은 물론 보는 시청자들까지 뜨거운 욕망의 용광로에 한데 빠져들어 흥분하고 아파하게 만들었던 <발리에서 생긴 일>과는 달리, <패션왕>의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혹은 미처 제대로 끓어오르지 못한 이야기는 보는 이가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H3>좀처럼 몰입하기 쉽지 않은 사각관계</H3>
“사장과 여직원은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가영(신세경)이 기습키스를 하자, 영걸(유아인)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는 멜로드라마의 클라이맥스이자 그동안 두 사람이 쌓아온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지만, 가영과 영걸의 키스는 그렇지 않았다. “내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준” 영걸에 대한 가영의 감정이 고마움에서 사랑으로 바뀌는 과정이, 가영의 용기 있는 행동이 이후 둘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이, <패션왕>에는 누락돼 있다. 반면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수정(하지원)과 인욱(소지섭)의 첫 키스는 그동안 외면해왔던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인정한 순간이자 재민(조인성)의 질투와 분노에 불을 지핀 계기였다.재민과 수정이 서로를 간절하게 원할 수밖에 없었던 건, 각자가 가진 것과 결핍된 것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수정은 재민에게 돈을, 영주(박예진)와 정략결혼을 한 재민은 수정에게 진짜 사랑을 갈구했다. 결핍은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욕망을 부르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 상대에게 끌리는 감정은 로맨스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패션왕>에서 결핍-욕망-로맨스의 매커니즘을 따르는 인물은 재혁(이제훈) 뿐이다. 늘 아버지(김일우)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김 실장(김병옥)에게 무시당하던 재혁은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안나(권유리)를 수석 디자이너로 채용하지만, 오히려 재혁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은 안나가 아닌 가영의 천부적인 재능이다. 성공적인 컬렉션을 축하하는 아버지의 시계선물과 김 실장의 칭찬이라는, 그동안 재혁이 아무리 애를 써도 얻지 못했던 것들을 가영이 대신 획득했다. 술만 마시면 가영에게 셀 수 없을 만큼 전화하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가영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가고, 심지어 강제로 키스까지 하는 재혁의 무모한 사랑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다.<H3>반전을 노릴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H3><패션왕>이 ‘정재혁의 드라마’처럼 느껴진다면, 그래서다. 문제는 욕망이 불분명한 나머지 인물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혁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판매원부터 시작해 온갖 수모를 견디며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올랐고, 한 때 재혁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안나는 계급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영주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는 캐릭터다. 그러나 <패션왕>은 안나가 재혁과 가영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열등감을 좀처럼 표현해내지 못했다. “염치 불구하고” 재혁에게 뉴욕패션스쿨 입학 문제를 부탁하면서도 비서가 건넨 돈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영걸에게 “사장님이 무슨 짓을 해도 사장님 편”이라 말하면서도 영걸이 가장 싫어하는 재혁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가영 역시 마찬가지다. 가영의 목표가 돈인지 패션인지 모호한 상황에 이르자, 가영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재혁과의 멜로 라인도 좀처럼 힘을 받지 못했다. 가장 상위계급에 위치한 재혁이 가영, 안나, 영걸과 충돌하며 그들을 자극하는 동안, 나머지 셋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그러나 드라마의 절반을 채운 지난 10회에서 재혁이 가영에게 가영의 이름이 박힌 재킷을 건네고, 영걸이 가영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손 잡고 일할 수 없는” 조마담(장미희)과 사업 파트너가 되면서 <패션왕>은 적어도 1막보다는 나은 2막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재혁의 선물에서 과거 영걸에게 받았던 인간적인 마음을 느낀 가영은 과거 재혁이 강제키스를 할 때도 눈치 채지 못했던, 자신을 바라보는 재혁의 눈길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과연 재혁과 가영은 8년 전 수정과 재민처럼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이자 각자의 욕망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과오를 만회하고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다.글 이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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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선영(TV평론가) 취재팀 글. 이가온 thirteen@편집팀 편집. 이지혜 seve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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