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1. 2002년 6월 10일 대구월드컵경기장한·일월드컵 D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기. 0-1로 뒤지던 전반 40분 대한민국에 페널티킥 기회가 찾아왔다. 키커로 나선 남자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엿보였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볼을 향해 서서히 다가선다. 남자의 왼발을 떠난 공은 그러나 골키퍼에 막히며 무위로 끝났다. 결정적인 찬스가 날아가자 경기장은 탄식으로 가득 찼고 키커는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경기를 이어가던 남자는 후반 32분 극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한다. 그의 왼발을 떠나 30여 미터를 날아간 볼은 문전으로 달려들던 안정환의 머리를 스치고 굳게 닫힌 상대 골문을 열어젖혔다.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순간이었다.#2. 2003년 12월 7일 일본 사이타마 경기장동아시아컵 2차전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기가 한창이었다. 대한민국이 1-0으로 앞서던 후반 13분 중국 선수가 머리를 움켜쥐고 그라운드를 나뒹굴고 있다. 중계 화면에는 대한민국 선수가 거친 파울을 범한 중국 선수의 뒤통수를 내치며 분노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의 거친 몸싸움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대한민국 선수는 퇴장 명령을 받고 경기장 밖으로 물러났다. 대한민국은 수적 열세 속에 힘겨운 리드를 지키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순간의 실수로 팀에 위기를 초래했지만 문제의 당사자였던 대한민국 선수는 일약 스타가 됐다. 국민적인 별명을 얻었고 당시 상황을 재현한 수많은 패러디물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을용타’의 주인공 이을용(36)이 지난 달 23일 정들었던 유니폼을 벗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걸어온 축구 인생은 위의 두 장면과 많이 닮았다. 흡사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다. 축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 반면 밑바닥에서 절망의 시간도 겪어봤다. “은퇴 후 지인들을 만나고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을용. 최근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축구선수로서 걸어온 길과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인간 이을용에 대한 솔직한 얘기를 들어봤다.
◇ 산골 소년의 축구 입문“시골은 논밭이 많다. 겨울에는 연탄으로 골대를 만들어 놓고 동네 형들과 공을 차며 놀았다.” 강원도 태백출신인 이을용은 황지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그는 “반 대항 축구 시합에 나갔다가 축구부 감독의 눈에 띄어 축구를 시작했다”며 “당시에는 운동부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빵과 우유를 나눠줬다. 그런 부분도 운동을 시작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라고 털어놨다. 이을용은 강릉중학교를 거쳐 지역 명문이던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에 진학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지역 라이벌인 강릉농공고(현 강릉중앙고)와 정기전은 이을용에게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두 학교의 불꽃 튀는 라이벌전은 재학생과 졸업생들뿐 아니라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연례행사다.그는 “당시 정기전이 열리는 날이면 전국의 동문들이 다 모였다. 외국에 있는 동문들도 찾아온다. 게임에서 농고가 이기면 상고 학생들이 다음 날 농고를 찾아가 정문을 뽑아 놓고 유리창을 깨는 등 분위기가 과열됐다. 요즘은 많이 얌전해 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 도중에 상대와 심한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허다하다. 경기장에서는 서로 앙숙이었지만 밖에서는 선수들과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며 “게임에 지면 동문들의 질책이 무서워서 짐을 챙겨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 나가기도 했다”고 에피소드를 전했다. 동문들은 축구에 대한 뜨거운 관심만큼 후배들을 이끌어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훗날 이을용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도 동문들의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방황의 시기, 결국은 축구가 답이었다고교 졸업을 앞두고 울산대학교 진학이 확정된 이을용은 정해진 길을 거부하며 방황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을용은 “울산대에 입학하기 전 잠시 쉬면서 공백이 있었다. 운동이 하기 싫어서 도망쳤다. 당시 최만희 울산대 감독에게 잡혀 와서 엄청 맞았던 기억이 있다. 운동을 그만두려고 마음먹고 대학교 선배들과 싸우고 진학을 포기했다”고 전했다.때맞춰 어려워진 가정형편도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이을용은 “아버지가 쌀 도매업을 했다. 가게직원이 불미스런 사고를 내는 바람에 장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돈이 나올 여력이 없었다. 스무살이 되니까 부모한테 돈 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막노동부터 시작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며칠씩 계속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나이트클럽에 몸을 담았던 얘기로 넘어갔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이을용은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는 일화로 유명세를 탔다. 그는 “당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성인회관에서 일하던 친구를 찾아 충북 제천으로 갔다. 거기서 잠깐 심부름을 해주다 우연히 축구계 지인을 만났고 그분이 술집 사장에게 나와 관련된 이런저런 사건들을 털어 놓았다. 당시 그 사장이 우리 삼촌과 친구라는 걸 알고 집에서 잡으러 오겠다는 생각에 부천에 있는 친구를 찾아 도망치게 됐다. 그 내용이 와전돼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런 저런 방황을 거듭하며 이을용은 “운동선수가 다른 일로 돈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94년 미국월드컵을 지켜보며 긴 방황에 지쳐 있던 이을용은 “운동을 다시 하고 싶어졌고 축구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 다시 찾아온 기회의 순간이을용은 1995년 실업축구단 한국철도에서 본격적인 성인 무대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한국철도 사령탑이던 이현창 감독의 부름을 받게 된다. 그는 이현창 감독과의 인연에 대해 “당시 한국철도 연고지가 강릉이었다. 강릉상고 시절 전지훈련 중이던 한국철도와 연습게임을 하면서 이 감독님이 나를 눈여겨봤다. 내가 방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한국철도에 입단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한국철도에서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게 1년 8개월 정도를 뛰고 곧바로 상무에 입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을용은 이어 “상무에서 군 생활 동안 저녁에 운동을 정말 많이 했다. 줄넘기를 특히 열심히 했다. 프로에 진출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정말 다시 하라면 못할 정도로 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렇게 상무에서 군 생활을 마친 이을용은 199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부천SK(현 제주유나이티드)유니폼을 입으며 프로무대에 데뷔한다. 그해 말 당시 허정무 감독에 의해 국가대표에 발탁되고 이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의 주역으로 거듭나며 축구 인생의 정점에 서게 된다.
◇ 평생의 은사, 귀네슈와의 인연이을용은 2002년 월드컵의 여세를 몰아 터키 트라브존스포르에 입단한다. 당시 160만 달러라는 최고액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해외 무대에 진출했다. 그러나 부상과 구단의 연봉 지급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1년 만에 안양 LG(현 FC서울)로 복귀한다.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이을용은 2004년 터키 무대로 재입성해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는 세뇰 귀네슈 감독과 만나게 된다. 귀네슈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터키에서 두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을용은 2006년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로 복귀한다. 2007년 귀네슈 감독이 FC서울 사령탑을 맡으면서 그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귀네슈 감독에 대해 이을용은 “귀네슈 감독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 선수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도록 돕는다. 히딩크 감독도 마찬가지고 명장들은 자신들만의 체계가 있다”며 “동계 훈련 때부터 그래프를 만들어 그 리듬대로 선수들을 이끌어 나간다. 분석이 상당히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을용은 이어 “은퇴 후 터키로 지도자 연수를 떠난다. 축구를 했던 사람으로서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터키로 가는 이유는 귀네슈 감독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며 “지금도 가끔 통화를 하며 연수에 대한 일정을 상의한다. 지도자로서 팀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는지, 팀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 유소년을 육성하는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 감동적인 은퇴식, 인생의 2막을 준비하며...이을용에게 강원FC는 특별한 의미다. 2009년 해외 팀을 포함 여러 구단의 러브콜을 뒤로 하고 그는 신생팀 강원의 유니폼을 택했다. 고향팀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강원FC를 선택한 것은 고향 팀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창단 때 3년만 팀에서 뛰고 은퇴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정도면 팀이 정상 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 시즌 팀 성적이 좋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며 “선수생활을 1-2년 더 하고 싶은 미련이 있었지만 갑작스런 은퇴는 아니다. 이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계획대로 옮긴 것이다. 아쉬울 때 접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라고 했다. 이을용의 은퇴식은 축구팬들과 지역민들의 관심 속에 잊지 못할 감동을 남겼다. 은퇴식 당시 기억에 대해 이을용은 “축구 선수로서 은퇴식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 큰 영광이다. 경기를 마치고 인사를 전하면서 지나온 과정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팬들이 경기장에 남아 기립박수를 쳐주는데 울컥 눈물이 났다”고 전했다.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이을용은 “국내 감독뿐 아니라 외국인 지도자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축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유럽 무대를 경험하며 국내와는 다른 시스템도 경험했다”며 “지도자로서 많이 공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을용은 이어 성공적인 지도자 뿐 아니라 후배들에 귀감이 되는 롤모델로 거듭나고 싶다는 소망도 남겼다. 그는 “선수로서 밑바닥도 경험해봤고 최고의 영광도 누려봤다. 이런 과정들이 축구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은퇴 이후의 모습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을용과 20년 가까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비 스포츠 최종환 대표는 “이을용은 어려운 시절을 겪어봐서인지 인간미가 느껴진다. 주변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 보육원 후원활동 같은 공적인 행사에서도 형식적인 모습을 버리고 진정으로 아이들과 어울린다”며 “지도자가 되더라도 개인적인 명예보다 후배들이 어떤 선수로 성장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선수생활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이을용. 그는 “부지런하고 착실했던 선수, 운동장에서 정말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한결같은 그의 인상과 꼭 닮은 대답이었다. 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 sport@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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