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진기자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정찬용(54)은 벼락이었다. 1999년 여름, 그의 영어 학습법은 사람들 사이에 한 순간 내리꽂혔다. 기존 영어 교육을 뒤엎는 도발적인 그 이론에 감전되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 영어강사도 교육전문가도 아니다. 대기업에서 조경 일을 하다가 스스로 깨친 새로운 방법으로 영어 전도사가 됐다. 영어와의 행복한 화학작용으로 제2의 인생도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초판 발행 후 대만과 일본·중국 등 국내외 300만부 이상 판매. 영어학습서 사상 몇 안 되는 밀리언셀러 등극. 정찬용씨가 쓴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성적표다. 일명 ‘영절하’로 통한다. ‘한국 출판시장의 살아있는 전설’이란 수식이 과장이 아니다. 비결이 뭘까. 아무래도 저자 특유의 ‘흥행 동원력’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개인 이력도 흥미롭다. 20여년 간 한 우물만 판 조경학 박사가 나이 마흔 셋에 영어전문가로 변신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를 만났다. 남다른 성공 비결을 들어봐야 했으므로. 현재 언어연구소장으로 있는 서울 서초동 GN에듀케이션 사무실로 찾아갔다. 첫인상이 상상 밖이었다. 희고 창백한 피부에 마른 체형. 딱딱하고 살짝 날카로워 보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웃음과 위트가 흘러넘치는 유쾌한 남성이다. 게다가 강연의 대가답게 논리력과 설득력, 낙천과 긍정의 에너지가 한데 어우러져 상대를 ‘정찬용식’ 매력 속으로 풍덩 빠뜨려 버리기까지. 분명 그에겐 특별한 마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정 소장은 운명론을 꺼내 들었다. 문득 이런 단상이 떠올랐다. 베토벤은 교향곡 제5번 ‘운명’을 쓸 때 “시련과 고뇌, 평온함, 열정, 도달한 자의 환희.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지…. 그래, 정 소장의 ‘운명교향곡’도 이랬다. ‘따 따 따 딴~.’ “운명인 것 같아요. 제 두 번째 인생은 충격적인 사건이 발단이 됐습니다.”‘제1악장 고뇌와 시련’ 독일어 공부 무용지물 되다정 소장 삶의 운명적인 첫 사건은 박사 과정을 밟던 독일 유학 시절에 일어났다. 1984년 가을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 안내원에게 ‘지하철역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생뚱맞게도 영어였다. “제 독일어가 전혀 독일어답지 않아서였어요. 정말 큰 충격에 빠졌죠. 나름대로 한국에서 독일어를 꽤 공부했고 제법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말 못하고 못 알아듣는 고생은 계속됐다. 다닐 학교를 찾는 데만도 사흘이 걸렸단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길을 잘못 든 경우가 부지기수며, 열차 안에서는 안내방송을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역에 내리기도 했다. 역 이름 표지판을 못 보면 끝이라는 생각에 창문 밖만 바라보고 갔다. 수업시간엔 그가 입을 열면 학생들이 모두 까르르 웃었다. “제가 사용하는 독일어가 이상하다며 어디서 배웠냐고 묻더라고요. 시대에 뒤떨어진 옛 단어들과 문어체를 사용해서 모양새가 어색했나 봐요. ‘나는 개를 키운다’는 말을 ‘본인은 견공을 양육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요. 완전 좌절해서 독일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아예 말문을 닫아버렸죠.” 그는 지금까지 독어를 공부한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망한 그에게 희망의 빛이 비쳤다. 때마침 발생한 스모그 경보로 인해 2주 동안 집에만 갇혀 있게 된 것. TV에서 관련 뉴스를 반복해 듣다 보니 “어라? 빨랐던 그들의 말이 확 느려진 느낌이 들고 이해가 되더라”며 어느 날 귀가 뻥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됐단다. 이 작은 깨침을 최대한 활용해 독일어를 공부했고 보통 1~2년 걸리는 독일대학 유학생 어학시험에 6개월 만에 합격, 정식 입학자격을 따냈다. “영어를 잘 듣기 위해 많은 것을 귀에 담을 필요는 없어요. 원어민의 발음과 대화 속도로 녹음한 테이프든 비디오든 어느 하나만 골라 귀가 뚫릴 때까지 계속 들으면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중요한 것은 한국어로 해석하지 않은 채 매일 꾸준히 듣는 거예요.” 아이러니한 건, 조경을 공부하러 갔다가 영어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제2악장 평온함’ 조경전문가서 어학 달인이 되다 독일에서 귀국한 그의 성장 속도는 무서웠다. ‘독일 조경학 박사 1호’. 정찬용이란 이름 앞에 붙은 타이틀은 조경 유학파가 드문 상황에서 몸값을 치솟게 한 특기가 됐다. 연봉 4800만원. 당시 과장급이 3500만원이었으니까 동종 업계에서 당대 최고의 대우를 받고 1994년 6월 대기업 환경사업부에 스카우트됐다. 주로 도시·공간 계획사업을 수주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 유학시절 터득한 언어 학습 비법을 담아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책을 냈는데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화근이 됐다. 더 이상 ‘일반인’이 아닌, 유명인사가 된 그를 회사에서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부서 내 업무 효율을 위해 복장 자율화, 출근 시간 유연화 등 혁신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던 그가 곱게 보이지 않던 터였다.격투기 선수 서두원(30)이 GN에듀케이션을 방문해 정찬용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인터뷰 중 KBS TV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연했던 2종격투기 서두원 선수가 지나다 정 소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수업을 들으러 온 모양이었다. 시합할 때 대결하는 선수가 영어를 사용할 때가 많은데 상대편에서 오가는 말, 이를 테면 작전을 알아듣기 위해 배우러 왔단다. “서 선수는 여기(GN에듀케이션) 다닌 지 6개월 정도 됐어요. 워낙 처음부터 문법과 단어를 잘 몰랐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흉내 내기를 잘 하더라고요. (영어)소리를 잘 따라하니까 귀가 쉽게 빨리 뚫렸죠. 지금 영화나 미드를 보여주면 웬만한 주제는 다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토익 점수가 신발 사이즈 수준인데 두 달 만에 700점을 올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상당수다. 찍기 실력이 아닌 이상 이런 비법은 온 지구상에, 온 우주를 다 뒤져도 없다고 못 박았다. 기본기에 충실한 제대로 된 학습이 최고의 비법이라고. 숨 가쁘게 걸어와 보니 그는 어느 새 영어의 달인, 삶의 달관자가 돼 있었다. 충분히 먹고 살 만큼 벌고 있어 경제적인 여유와 더불어 생활이 안정되고 평화롭단다.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운명이 닥쳤을 때 변화를 두려워 말고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4악장 환희’ 영어 풍요로운 삶의 원동력 되다그에게 또 한 번 중대한 삶의 운명적 사건이 찾아올까. 운명교향곡은 어떻게 흘러갈까.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이 그가 영어를 떠나는 순간만은 아니기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특별히 인생의 모토를 정해놓고 살진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신 큰 욕심 없이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게 행복인 것 같아요. 현상 유지를 목표라고 해두죠.(웃음)” 근시일 내에 실행에 옮길 계획은 영어 학습서 이외에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책들도 틈틈이 쓰면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정도다. 감성과 지성, 가정과 일, 글쓰기와 사회 참여 등에서 이룬 팽팽한 균형이 그의 또 다른 진취적인 무기인 듯했다.정 소장은 영어를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언어로 생각하기 보다는 영어 실력을 갖추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양한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풍요롭게 인생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것. 당장 그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강연과 책 쓰기를 할 수 있고 특화된 콘텐츠를 개발해 큰 투자 없이도 사업하며 수익도 꽤 내고 있으니까. 인생2막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영어를 배우는 데 있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중장년층은 경험, 성취 본능, 동기 부여 등이 젊은층에 비해 풍부하고 강해요. 영어 학습에서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다는 겁니다. 빨리 배우고 더 잘 할 수 있어요.” 이쯤에서 정말 궁금했던 질문 한 가지. “영어 잘 하는 비결은 뭔가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절대로 영어공부 하지 마세요.” 이어서 알려주는 영어 잘하기 비법 5계명을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수첩에 받아 적었다. 영험한 비기를 써내려가듯.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이코노믹 리뷰(er.asiae.co.kr) - 리더를 위한 고품격 시사경제주간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